2020-01-12 132회
"주님이 초대하시는 천국잔치"
2020년 1월 12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14 : 15 - 24 이사야 55 : 1 - 3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고백할 말이 있다며 말했습니다. "전 제 신부를 만나기 전까지 다른 여자의 품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식장 안이 웅성거리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여자인 제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신랑의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어느 할아버지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칠순을 맞아 잔치하는데,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소감 한마디하라고 부추기자, 결혼식장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습니다. "난 내 할멈을 만나기 전에 다른 한 여자의 품속에서 살았지." 그러자 장내가 웅성거리는데, 다음 말이 기억나지 않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근데 그게 누구였더라." 잔치에 이런 해프닝은 없어야합니다.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선원 [하멜의 표류기]에 보면 제주도를 떠나 전라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동안 관민으로부터 받은 이해를 초월한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 이렇게 적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 세상 어느 나라의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받은 대우보다 이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받은 대우가 보다 인간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근세조선에 와서 활동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를 토대로 저술된 달레의 [한국교회사 서설]에 이 한국인의 인정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또 잘사는 사람이건 못사는 사람이건, 밥 때 밥을 주고 잠잘 때 잠자리 주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길가에서 참을 먹고 있는 가난한 농사꾼도 행인을 굳이 붙들고 모자라는 밥을 나누어 먹인다. 크고 작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으면 생면부지라도 백년지기처럼 융숭한 대접을 한다... 혼례나 상례 같은 대사에 한국사람들은 제각기 일을 당한 집안 일을 돕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장보는 일을 맡고, 어떤 사람은 음식 장만하는 일을 맡는다. 아무 것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사람은 멀리 사는 친지들에게 그 대사를 통지하는 일을 자청하기도 한다. 어떤 집에 불이 나 타버렸다면 이웃의 어떤 이는 돌을, 어떤 이는 나무를, 어떤 이는 짚을 들고 와 제 밥을 먹어가며, 사나흘씩 무료봉사를 한다." 이 아름답던 정이 왜 현대사회에서 증발되었는가를 따져보면 다음 세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도시화라고 합니다. 농촌의 생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정으로 연결되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게 돼있는데 도시는 그 사이를 단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기계화입니다. 전화, TV, 인터넷, 스마트폰 등, 사람을 만나서 할 일들을 기계가 대신함으로 사람 사이가 단절돼버렸습니다. 셋째가 핵가족화입니다. 핵가족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는 자기중심적으로 양육되어 남들을 배려하는데 미숙하여 그것이 단절사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부터 부흥회라는 천국잔치가 열립니다. 옛적의 그 인정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하게 되길 원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의 천국은 잔치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22:2)라고 말씀합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잔치로 묘사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천국을 혼인잔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비교종교학에서는 유교를 제사지내는 집에 비유하고, 불교는 상갓집에 비유하며, 기독교는 혼인 잔칫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예비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영국의 C.S 루이스라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는 자기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성경에 나오는 그 천국, 죽지도 못하는 영생의 땅인데 그 인생이 얼마나 지루할까요?" 그러자 C.S 루이스는 "여보게, 자네가 모르는 것이 많네. 권태나 지루함은 타락한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네. 천국은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첫사랑의 잔치라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심장 뛰는 것 같아 도무지 내가 조절할 수 없고,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는 첫사랑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느 결혼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 16절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말씀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22:2)라고 하여, 이 잔치는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배설한 잔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혼인풍습은 혼인잔치를 하기 약 1년 전에 약혼식을 하는데, 그때 신랑은 친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1년 뒤의 혼인잔치에 참석해달라고 미리 초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은 미리 시간을 조정하여 참석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의 약혼기간이 경과하면 신랑은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와서 혼인잔치를 여는데, 이때 전에 초청한 사람들을 재차 초청합니다. 이처럼 두 번에 걸쳐 초청 받고도 이에 불참하는 것은 큰 결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잔치는 일반인의 잔치가 아니라 왕자의 혼인잔치로서, 왕으로부터 두 번씩 초대받고도 다른 일을 핑계로 거절하는 것은 왕에 대한 큰 불경이요, 반역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다 일치하게 사양했다"고 하여, 서로 약속한 듯이 모두가 '사양'할 말을 준비하고 있다가 한결같이 모두 거절하여 왕의 초청을 무시하였습니다. 거절하는 이유를 보면, 첫 번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라고 말합니다. "나가 보아야 하겠다"며 강하게 거절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잔치에 참석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밭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 밭을 보지도 않고 샀다는 말이 납득되십니까? 설사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1년 전부터 초청을 받아 놓고서 꼭 이 시간에 밭을 보러가야만 하겠습니까?
두 번째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눅14:19). 요즘 말로 하면 "나는 지금 승용차를 샀기 때문에 시운전해야 하기에 가지 못하겠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날에 소를 시험해야 합니까? 그리고 소를 미리 시험해보지도 않고서 돈주고 산 뒤에 시험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소가 밭 가는데 신통치 않으면 물리겠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잔치 후에 소를 시험하면 안됩니까?
세 번째 사람입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20절). 자기는 장가갈 때 손님을 초청 안 했습니까? 그런데 왕이 아들 결혼식에 '오라'고 하는데 못 가겠다고 합니까? 자기 결혼식 때도 초청 받은 손님들이 이런 핑계로 한 사람도 안 왔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가 결혼해봤으니 잘 알만한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사람의 핑계가 제일 그럴 듯 합니다.
신명기 말씀입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 지니라"(신24:5). 하나님은 멋쟁이십니다. 'honeymoon'이란 신혼 한 달은 꿀처럼 달콤하다해서 꿀을 뜻하는 'honey'와, 달을 뜻하는 'moon'의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려 1년이나 군대도 보내지 말고 어떤 직무도 맡기지 말고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은 자기 신혼을 핑계로 왕의 아들 혼인잔치를 거절합니다. 자기 결혼 때는 사람들을 초청하고서, 이젠 신혼이라고 거절하니,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왕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랍권에선 초대에 불응하는 것을 선전포고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 같은 법적인 죄가 아니라, 왕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왕의 권위를 무시한 죄입니다. 왕의 호의를 거절하고, 왕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은 죄입니다. 좋은 뜻으로 잔치에 초청했는데, 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죄가 됨을 지적합니다. 초청에 대한 거절은 은혜에 대한 거절로서, 이 거절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즉위 3년에 모든 방백과 신하와 함께 180일간 주야로 잔치했습니다. 그리고 또 수산궁의 백성들을 위해 왕궁 후원에서 7일간 잔치를 더 열었습니다. 왕은 7일째 되던 날, 왕비에게 면류관을 씌워 아름다운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려고 "왕후 와스디는 나오라"고 했는데 왕후가 나오지 않자 왕의 마음에 진노가 불붙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왕후를 폐위시켜버리고, 에스더를 새 왕비로 세웁니다. 와스디가 간음이나 딴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왕의 초대를 거절한 것뿐인데, 그토록 격노합니다. 왕후니까 그 정도로 끝났지 일반백성이었다면 아마 사형에 처했을 것입니다. 왕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무서운 심판이 따릅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왕가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누가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석하는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잔치는 단순한 혼인잔치가 아니라, 천국 잔치, 즉 하나님 앞에서 벌어질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구원의 기쁨을 나누게 될 잔치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세상 만민을 구원에로, 천국의 잔치에로 초청하십니다. 전도자들의 전도를 통해서 세계 만국의 백성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처럼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절)하고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변명은 무엇입니까? 대체로 세 가지 변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 가짜와 위선자들이 많아서 교회에 나가기 싫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 엉터리 신자들도 있고 위선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 마음이 거짓되니 다른 사람도 모두 거짓되고 위선자로 보일 뿐입니다.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왜 세상에는 이렇게 종교적인 가짜가 많은가? 그 이유는 진짜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욕한다고 너무 의기소침하거나 자학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 좋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 증거를 찾아볼까요? 전철이나 시장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불구자나 걸인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웬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거지나 불구자들이 이렇게 많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다 예수 믿기 때문이 아니라 구걸 수단입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노래 백 번 불러봐야 돈을 주지 않으니까, 그래도 찬송가 몇 곡 배워서 부르면 순진한 예수쟁이들이 동정심이나 형제의식으로 동전 몇 푼이라도 던져주니까 영업상 찬송 부르는 것이지, 믿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참으로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찬송가를 그렇게 이익의 수단으로 부르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불교 신자가 그렇게 많다는데 왜 찬불가나 나무아미타불하는 거지가 없습니까? 천주교인들이 그토록 구제를 잘한다는데, 왜 그런 자리에서 아베마리아를 안 부릅니까? 누가 뭐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호소해야 그나마 돈을 주니까 찬송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많아 교회 안 나간다는 말보다는, 솔직히 나가기 싫어 안 나간다고 말이 진실한 표현일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는 죄가 많아 예수 못 믿겠다'고 하는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대답은 겸손하고 순진한 것 같지만, 이 말은 "나는 병이 많아서 병원에 못 가겠다", "나는 몸에 때가 많아서 목욕탕에 못 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가 많기에 더욱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우리는 배가 고프기에 음식이 필요하고, 목마르기에 물이 필요하듯,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이기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셋째, 가장 많은 핑계는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빠서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밭을 사고, 소를 사고, 또 장가들었기에, 직장과 가정 일로 바빠서 못 가겠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밥 먹고, 화장실은 갑니다. 아무리 바빠도 연애할 시간은 있습니다. 바빠서 연애 못한다고 말한다면, 아직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나, 연애하다 실연으로 상처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연애할 것입니다. 간혹 새벽에도 젊은 남녀가 데이트하는 것을 봅니다. 밤새 함께 지냈을 텐데 그래도 헤어지기 아쉬워 그 새벽까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사랑은 서로의 시간을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마음 없다'는 표현으로, 그 일에 마음 없으면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댑니다. 시간은 누구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인데,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만사를 제치고라도 하고, 다른 사람은 그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하기에, 그 일 때문에 이 일은 시간 없어 못한다고 핑계 대는 것입니다.
세계무역센터협회 부총재인 이희돈 박사는 얼마나 바쁜지 시간을 15분 단위로 쪼개 쓸 정도인데, 주일성수를 위해 뉴욕에서 2시간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 와서 그가 섬기는 워싱턴 성광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한번은 전 세계 유력인사 20명으로 구성된 노벨 위원으로 스웨덴에 가서 회의하다 주일을 맞게되자 그는 스웨덴 왕에게 높은 분의 초청으로 미국에 다녀와야겠다고 했더니, 대통령의 초청으로 알고 다녀오라고 해서, 금요일에 출발하여 워싱턴에 와서 자기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또 차량안내 봉사를 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지 않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 먼저 초대된 자들이 갖가지 핑계로 거절하자, 다른 사람들을 데려다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가서 사람들을 불러다 자리를 채웠지만, 그래도 자리가 남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고 합니다. 그리고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14:24)며,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그 잔치에 참석치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면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슥7:13).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응답치 않으면, 우리가 부를 때 주님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잔치를 여시고 부르시는데, 우리가 이를 거절한다면, 우리가 주님께 울며 부르짖어도 주님은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미국 중서부 어느 마을에서 한 젊은이가 마리라는 처녀를 좋아했는데, 마리는 이 청년이 별 볼일 없는 촌뜨기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지만, 더 나은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없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그 청년을 가끔씩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에게 이런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친애하는 마리! 나는 당신과의 사귐을 끝내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사귐이 당신의 행복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당신이 내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포기하고 당신의 원대로 하겠습니다. 답장하고 싶지 않으면 이 편지가 작별인사가 될 테니, 행복하게 살기 바랍니다. 그러나 답장하려면 분명한 뜻을 밝혀주기 바랍니다." 마리는 답장하지 않고, 곧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 청년이 훗날 백악관 주인이 된 링컨입니다. 그러나 마리는 원하는 이 없이 사람들에게 잊혀졌습니다. 세상에는 마리처럼 자기 운명을 바꿀 초대를 거절하여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초청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축복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주님 전으로 인도해야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주님은 잔치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시며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3).
옛날 어느 부자가 커다란 항아리가 놓고, 자기 하인 백 명에게 금화 한 닢과 작은 술 단지를 하나씩 나눠주며 말했습니다. "곧 큰잔치를 여는데 그동안 맛보지 못한 특별한 포도주를 연회에 내놓으려고 하니, 너희는 내가 준 금화로 각기 다른 포도주를 한 단지씩 사와서 이 큰 항아리에 섞도록 해라. 여러 가지 포도주를 섞으면 어떤 맛일지 매우 궁금하구나." 하인들은 술 단지와 금화를 가지고 각자 포도주를 구하러갔는데, 한 하인은 주인이 준 금화는 자기가 챙기고 자기 단지엔 물을 담아 슬그머니 큰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큰 항아리에 물을 조금 섞은들 누가 알겠어.' 잔칫날 부자는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잔치는 그동안 수고한 너희들을 위한 잔치다. 너희가 사온 술을 마음껏 마시며 실컷 즐겨라." 그런데 그 술은 전부 맹물이었습니다. 모두 '나 하나쯤'하며, 금화를 빼돌리고 물을 부은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면 이렇게 맹물이 됩니다. '나부터' 해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는 [죄스러운 침묵]이란 책에서 말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자기 믿음을 표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을 정복할 마음을 잃고 살아가는 것은 신앙적인 자폐증이다." 우리 왕이신 주님이 잔치에 손님 채우길 얼마나 원하시는가를 표현하는 단어는 본문의 '강권하여'인데, 물리적인 힘을 써서라도 구원하라는 말로서, '팔을 비틀어서라도'라 뜻입니다. 한강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한 대화보다도 팔을 비틀어서라도 우선 살려놓아야 하고,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은 옆구리를 걷어차서라도 살려놓는 것이 강권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강권해서라도, 주님께서 베푸신 잔치 자리로 인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은 초청된 자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를 팔아 그 돈 가져오라거나, 밭을 팔아 돈 가져오거나, 장가들어 부부동반해서 오라는 등의 전제 없이, 단지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소서", 그냥 주님 앞에 오기만 하면 됩니다. '오라'는 단어가 성경에 무려 1,900번이나 나옵니다. 영국 클램팜에 화가요 작가인 샬롯 엘리옷(Charlott Elliot)이란 여인이 있었습니다. 20대부터 촉망받던 그녀가 30대가 되어 갑작스런 병을 앓게 되며 매사에 반항적인 여인이 되어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걱정되어 친구인 말란 목사(Dr.Malan)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말란 목사가 신앙이야기를 꺼내자 딸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느냐?"며 신경질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때 이 목사님의 대답 한 마디는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에게 오시오(Just as you are)"였습니다. 이 말이 화살처럼 가슴에 찔리며 그녀는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만지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무릎 꿇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드리며 회심하고서, 한 찬송가를 씁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찬282장) 이 찬송의 원 제목은 "Just as I am"으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집회마다 불러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나아오게 했습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오후 찬양예배 시간부터 부흥성회를 엽니다. 이번 성회에도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부흥회 강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 총장을 지내신 분으로, 학자로서 탁월한 실력과,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지니신 분으로, 주옥 같이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직장 출퇴근하는 분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새벽집회 마치고 교회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그대로 출근하십시오. 저녁에 직장에서 교회로 직접 오셔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에 참석하십시오. 그렇게도 못할 특별한 사정이 있으시면, 여러분 대신 다른 사람이라도 참석시키십시오. 이번 부흥성회 일곱 번 집회에 빠지지 말고 꼭 개근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분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풍성한 잔치에 넘치는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