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1 79회
"고난에 대한 믿음의 자세"
2018년 3월 11일 주일예배
베드로전서 2 : 18 - 25 ; 시편 119 : 71
남편이 교회 다니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무슨 말이에요?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셔서, 십자가 고통까지 겪으셨으니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이해하시죠." "그래도 결혼생활은 해보지 않았잖아. 바가지만 긁는 아내와 평생 같이 사는 남자의 고통을 예수님이 이해하겠어?" 아내가 말합니다. "그렇긴 하네요. 속 좁은 남편, 말썽만 부리는 자식들 때문에 속이 까맣게 썩는 아내 마음도 이해하긴 힘드시겠네요." 과연 그럴까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백혈병과 뇌종양으로 어린 두 자녀를 3개월 사이 잃었는데 장례식장에 오신 목사님이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신다"고 말하자, 이 집사님은 "목사님이 감당할 수 있으면 한번 감당해보세요"라고 되받아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답니다. 아이가 투병할 때 주위에서 '집사님의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느니 '혹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나 돌아보라. 하나님이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실 것이다'는 말에 위로가 아닌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상담가들은 재난 당한 가정을 찾아가 그들의 심정으로 기도하고 함께 있어주면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98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유대인 엘리 위젤은 제2차 대전 중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입니다. 그는 자기 목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가족의 죽음 이상으로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사건을 회고합니다. 그것은 불과 13살 정도 된 한 소년이 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전체 수인들이 집합된 자리에서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죽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일입니다. 반시간 이상 목 졸린 채 허공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혀를 내밀고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흘리고 서서히 죽어가던 이 소년을 보며 엘리 위젤은 자기 가슴속에서 피눈물나는 외마디 절규를 토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때 그는 자기 안에서 이렇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저 소년과 함께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수년 후 엘리 위젤이 생존자가 되어 불란서 파리에 가서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auriac)을 만났을 때 그때의 체험을 들려주자, 모리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타난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싶소. 2천년 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리스도인의 고난관은 첫째,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고 필연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의미와 필연성과 당위성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하나님은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생명과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있습니다. 당하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용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깊은 내면에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지만,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고난의 성격과, 이를 이겨낼 신앙적 자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자기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라는 말씀대로,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형벌이요, 보응이요, 심판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바로 자신의 죄나 실수의 결과입니다. '내겐 잘못이 없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부질없는 변명과 핑계입니다. 모든 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지 않아 출세하지 못했고, 열심히 일하지 않아 가난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기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을 마셔서 몸이 약해지고, 규칙적인 신체관리를 하지 않아 병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자신의 죄로 인해 초래되는 고통에 대처하는 길에 대해, 오늘 말씀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라고 했습니다. 벌을 달게 받는 것, 곧 회개를 뜻합니다. 내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기에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면 고통을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비록 내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지만 그 고난 중에 겸손하여 진실과 믿음을 얻는다면 그 고난은 도리어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더욱 고난이 심해집니다. 아버지가 잘못한 아들을 매로 때릴 때, 매를 가장 덜 맞는 길은 "잘못했어요!"하고 아버지 품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를 피하려고 도망하면 매를 더 맞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사1:5-6).
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종의 경고체계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확성기'가 고통입니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거나 뜨거운 불에 손을 갖다 대면 고통은 뇌에 조심하라고 소리치듯 우리가 겪는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그 고통이 없다면 잘못된 줄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계속 달려가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맙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나님께 피하게 하는 확성기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괴롭긴 하지만 하나님께 얼마나 큰 감사할 조건이 되는지 모릅니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정신과의사 폴 튜니어의 [어느 의사의 임상기록]에 실린 체험담입니다. 악성 빈혈로 고생하는 한 직장 처녀를 담당 의사가 무려 반년이나 정성을 쏟았으나 치료의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입원치료를 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왔는데, 중증의 빈혈환자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얼굴 혈색으로 그녀의 손엔 병가 허락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녀의 회사 의무관의 소견서가 이렇게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환자의 빈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제가 실시한 혈액검사에서는 완전히 정상으로 나타났음. 그러나 담당 의사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병가를 얻어보내니 선처 바람." 의사는 즉시 환자의 혈액을 검사해보았더니, 그녀는 지금 지극히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에 홀린 양 멍청해져 있는 의사에게 환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한없이 증오하던 사람을 며칠 전에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부터 제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긍정적인 욕망이 생겼습니다." 회개는 영혼의 병을 고쳐 구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아픔도 함께 고치게 됩니다.
둘째,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19절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라고 말씀에서 '부당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아디코스'란 단어로서 영어로는 'injustly'라는 말인데, 불공정하고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 잘못과 무관하게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형제가 사업한다고 보증 서 달라는데, 외면할 수 없어 보증 서 줬더니, 그가 사업에 실패하여 나까지 망하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웃집에 불이 나서 내 집까지 타버리는 경우도 그렇고, 고속도로에서 사고 난 차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기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사고난 사람 차에서 꺼내주다가 뒤에서 달려오던 차에 의해 도와주던 사람까지 사고를 당한 사례도 이런 경우입니다. 내 잘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런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왜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처럼 억울한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하며, 겪고 있는 고통 그 자체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그 원인으로 더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19절)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은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알고 계시며, 이 부당한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고난의 상징인 욥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재산과, 가족, 건강까지 잃었을 때, 그 고난 중에 몸부림치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자기의 모든 고난을 주님은 아시고,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여 순금 같이 빚으시려는 섭리를 깨닫고 그 고난을 이겨냅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통에 대한 그의 소논문집 [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통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어 보기에 나쁘다. 고통을 다만 괴로움이나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보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면 현재의 고통과 부조리, 어려움만을 보지 않고, 그 뒤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내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뭐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때로 부당하게 여기는 고난까지 우리에게 필요하여 허락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지난 1월 31일자 한겨레신문에 한 미국인의 독일 의료 경험 수기가 실렸습니다. 이란 출신의 미국 작가 피루제 뒤마는 최근 독일에서 자궁근종 절제술을 받았는데, 의사가 복강경수술을 통해 수술당일 퇴원할 수 있다고 하자, 뒤마는 퇴원 뒤 찾아올 통증이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에게 수술 뒤 통증관리에 대해 묻자, 어린이 감기약에 들어가는 매우 약한 진통제 이부프로펜을 처방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건 두통 정도 가벼운 통증에 쓰는 약인데, 신체기관을 잘라내는 수술엔 그보다 강력한 진통제를 줘야죠"라고 말하자, 외과의사까지, 이 수술엔 마취성분이 든 진통제가 필요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녀는 마취과 의사에게 "이부프로펜을 처방받게 될텐데, 수술 뒤 며칠은 코데인성분이 든 진통제를 먹어야하는 것 아니냐?"며 요구하자 마취과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은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를 없앨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고통이 당신을 이끌 것입니다. 고통은 당신이 얼마나 더 쉬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지금 낫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겁니다. 바이코딘을 먹으면 고통은 느끼지 않겠지만, 당신의 몸이 하는 이야길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통제에 의존해 무리하게 될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입니다. 신장에 좋지 않으니 이부프로펜도 조심하여 먹어야할 때만 드세요. 쉬면 당신의 몸은 저절로 나을 겁니다." 그동안 이부프로펜을 캔디처럼 먹어왔던 뒤마는 "나의 몸을 믿으라는 의사의 온화한 충고에 눈물 흘릴 뻔했다"면서, 이부프로펜을 한두 알 먹고 의사의 말대로 휴식을 취하고 별 탈 없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우면 강력한 진통제를 써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데, 독일 의학은 육체의 고통까지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놀랍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중에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참고 견딤이 필요합니다.
셋째, 선을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선택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 자원하는 고난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까지도 십자가를 진다고 말합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속썩이는 것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십자가가 아니요,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는 내가 피할 수 있고, 외면할 수도 있지만, 의를 위해 자원하여 고난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고난이 가장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야 결코 자랑일 수 없고, 부당한 고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이것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공로일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지만, 의를 위해 스스로 자원하는 고난이 가장 고상합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고통이 있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스스로 고난을 선택할 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미우라 아야코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설령(雪嶺)'의 실제 인물 나가노 마사오(1880∼1909)는 국철 아사히카와 운수사무소의 서무주임이었습니다. 1909년 2월 28일, 철도부직원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해 주일에 각 역을 순회하며 전도했던 그는 나요리 지역 순회전도를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그가 탄 열차가 시오카리 고개의 급경사지에 진입했을 때 객차의 연결고리가 풀려 열차가 반대방향으로 폭주하며 전복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는 재빨리 열차 승강구 발판 쪽으로 뛰어가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기차의 속도를 겨우 줄였으나 속도는 더 이상은 줄지 않았습니다. "점점 급커브가 육박해 오고 있었다. 다시 폭주하면 기차는 틀림없이 전복한다. 여러 개의 급커브가 차례차례 기다리고 있었다고 노부오는 판단했다…노부오의 손은 핸드브레이크에서 떨어졌다. 그 몸은 철로를 향해 날았다. 기차는 맥없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노부오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마침내 기차는 완전히 정지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 1968년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당시 이 사건이 기독교 복음전파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대였다. 그러나 노부오의 죽음은 그런 몽매함에서 사람들의 머리를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고 아사히카와, 삿포로를 중심으로 한 철도원 직원 몇 십 명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미우라는 '설령'의 작가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쿠조교회의 후지하라 에이기치씨 댁을 방문했을 때, 그가 신앙수기를 보여주었다. 나가노 마사오의 생애가 기록돼 있었다. 나는 나가노 마사오의 위대한 신앙 앞에 납작하게 되도록 한바탕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깊고도 강렬한 감동이었다." 그는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21절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본을 따라오게 하셨는데, '본'이란 팬맨쉽(penmanship), 즉 '습자본'으로, 글씨 쓸 때 밑 글씨를 따라 쓰도록 글씨를 익히는 공책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그 본을 따라갈 때,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고,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첫째, 고난 중에서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벧전2:22-23a). 예수님은 무고하게 고난 당하시며 '궤사', 즉 '거짓'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칫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함께 부당한 일을 행하고, 내가 어떤 비난을 받으면 같이 욕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온갖 욕을 받으시고도 함께 욕하지 않으시고, 그 고난 중에도 박해하는 자들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고통은 같은데 반응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고통의 결과를 상반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부당한 고난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고난 중에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b). 예수님은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 침묵하시며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부당한 고난 중에서 우리는 고난을 끼치는 자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하나님께 맡길 때, 주께서 갚아주십니다.
조셉 배일리(Joseph Bayly)의 [내 인생의 성시]입니다. "눈물로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말로 할 수 없어서 눈물로 울부짖나이다/ 두려움, 고통, 슬픔, 실패, 상처로 인해 말을 잃었으나/ 내 말없는 기도를/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들으십니다/ 주님/ 내 눈물을/ 내 모든 눈물을 씻어주소서/ 먼 훗날 그리 마옵시고/ 지금/ 여기서 닦아주소서."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아뢰며 자비를 간구할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고난을 통해 다른 이의 죄와 고난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예수님은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 죄를 대속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고,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 당하셨다면, 우리도 다른 이를 위한 고난까지도 대신할 수 있어야합니다.
김상호 공군중령의 [돌아눕는 행복]이란 글입니다. 어머니가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머니는 꼼짝 못한 채 누워 계셨고, 어쩌다 잠결에 몸을 잘못 움직이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 쓰라린 아픔을 토해내시며 보름이 넘도록 어머니는 몸 한 번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병상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하루는 작은형이 어머니의 귀에 조용히 물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천번 죽고 천번 사는 아픔이구나." 우리 형제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의 고통을 같이 나눠 갖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인가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 손을 잡고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지금 너희들을 위해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나에게 주십사고 말이다. 지금 나의 이 고통에 너희 고통까지 모두 합쳐서 내가 다 받겠다고 말이다. 내 기도가 이루어져서 앞으로는 너희들이 고통을 받지 않게 되기를 나는 지금 빌고 있단다." 며칠 후 어머니는 말없이 숨을 거두셨다. 어느덧 7년이 흘러 나도 모르는 사이 한 가지 행복을 느끼는 버릇이 생겼다. 밤에 잠자리에서, 돌아누울 때마다 '아, 내 몸이 이렇게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구나.' 돌아눕는 행복은 어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값비싼 선물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고통 중에 있든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담당하신 주님께 부르짖어 아뢸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고훈 목사님의 [목회 일기]에 실린 글입니다. "육십 오년 평생을/주님만 사랑하여 안수 집사직을/감당해 온 어느 날/교통사고를 크게 만났습니다.//다리는 부서지고/어깨도 부서지고/뇌는 수박이 땅에 떨어져/껍질은 괜찮아 보여도 속이 균열되듯/수술 받을 수 없는 정황이 되어 버렸습니다.//의사의 진단으로/주님 외에는 손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환상 같은 고통의 자리에서/다리 아픈 것도 없고/어깨 아픈 것도 없으나/머리 아픈 고통은 견딜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무의식적으로/집사님은 주님을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주님!/주님!/주님!//그때 주님은/십자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채찍 맞으신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다가오셨습니다.//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말씀하실 때/다리의 고통이 어깨의 고통 속으로/어깨의 고통이 머리의 고통 속으로/머리의 고통이 이제는/주님의 십자가 고통 속으로/전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그 즉시로/머리의 상처는 치료되었습니다.//이 귀한 말씀을 듣는 순간/주님은 제게/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는 것이/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은총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하셨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런저런 고난이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내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라면 회개할 것이요, 부당한 고난이라면 주님을 바라보고 참을 것입니다. 나아가 의를 위해서라면 고난도 자원하여 주님과 함께 승리와 영광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