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95회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
2019년 12월 22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2 : 8 - 20 ; 이사야 9 : 6 - 7
어느 회사 연말 종무식에서 사장이 김 과장에게 말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 중에 뭐부터 들을 텐가? 나쁜 소식? 김 과장, 올해까지만 회사 나오게. 그럼 좋은 소식은 뭐냐구? 내년부턴 김 부장으로 회사 출근하게." 회사에 나오지 말란 말에 크게 낙심했는데, 부장으로 나오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우리에게 나쁜 소식은 없이 언제나 이런 기쁜 소식만 듣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967년과 1968년은 미국에게 결코 유쾌한 해가 아니었습니다. 1967년 1월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려던 아폴로 1호가 발사실험 도중 전기회로에 불이나 우주비행사 3명이 숨졌습니다. 또 국내에선 반전기운이 고조되고, 세계는 평화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베트남에선 계속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중동전이 다시 일어났고, 중국은 수소폭탄실험을 성공했으며,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북한은 83명이 타고 있던 푸에블로호를 억류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선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폭동으로 혼란과 소요가 만연하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총에 맞아 숨졌고, 두 달 뒤엔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등,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앗아간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우주탐사 계획에 회의를 품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 과학이라기보다 쇼가 아닌가? 미국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달하려는 유치한 곡예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이 터졌지만 아폴로 우주탐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어, 첫 무인우주비행이 성공한 후 사람이 탑승한 우주비행이 수 차례 이뤄졌습니다. 그때 아폴로 8호는 달 궤도를 선회하고 오는 임무를 위해 평신도예배 집례를 맡기도 했던 신실한 크리스천인 프랭크 보먼(Frank Borman)과, 새로 신앙을 갖게된 제임스 러벨(James Lovell), 그리고 윌리엄 앤더스(William Anders)를 우주비행사로 선발했습니다. 12월 21일 오전 8시 화염을 토하며 하늘로 발사됐는데, 크리스마스 전날 밤 9시 30분 경, 전 세계가 지켜보는데 보먼이 말했습니다. "아폴로 8호가 여러분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1-2). 뒤이어 러벨이 말씀을 이었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보먼이 다음 구절로 마무리했습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입니다. 행복한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복된 지구 위에 있는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하며, 어두웠던 시절에 희망의 성탄메시지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영원히 기뻐할 만한 소식은 어떤 소식일까요?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먼저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미치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해당되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희소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2002년 월드컵 8강 전에서 스페인에 승리할 때, 우리 민족에겐 한없는 기쁨과 영광이었지만, 스페인 국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아쉬움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 세계 모든 백성에게 미칠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역사상 최대의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역사를 BC(Before Christ, 기원전)와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 기원 후)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일보다도 더 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역사에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개인에게도 최대의 사건이 됩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나의 종교]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5년 전 내게 믿음이 생겼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었다. 나의 모든 생활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나는 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고, 전에 원치 않았던 것을 원하게 되었다. 전에 옳다고 생각하던 일이 그릇된 것이 되고, 과거에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이 옳은 일이 되었다. 나의 생활과 욕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선과 악은 서로 그 의미를 바꾸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소식 중에는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야말로 가장 좋은 소식이 된 것입니다. 여기 '좋은 소식'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 하여, '복음(福音)'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야말로 인류가 듣게 된 최대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절인 11절에 보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救主)'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는 '소테르'라 하는데, 죄로 인한 저주와 심판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될 인간을 살리시려고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대학 합격소식이나, 선거에서 당선 소식, 혹은 복권 당첨소식보다도 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죽을 사람이 살아나게 되는 소식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 최대의 기쁜 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기쁜 구주탄생의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처음으로 들었던 사람은 이 땅의 높은 지위에 있는 제왕이나, 많은 재물을 소유한 재벌들, 혹은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은 전문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들에서 소박하게 양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큰 목장을 소유한 목장주도 아닌, 그저 몇 십 마리 양떼를 몰고 골짜기를 헤매며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군 천사가 나타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2)고 전했습니다. 이 소식은 이들에게만이 아닌 온 인류에게 미칠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구주탄생의 소식을 듣고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첫째, 목자들은 예수님 탄생의 소식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목자들의 반응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눅2:15). 천사들이 전해준 구주탄생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목자들이 그 소식을 믿지 않고 '밤새 양을 지키다 꿈을 꾸었거나, 헛것을 본 모양이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인데, 저들은 '이제 베들레헴에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전해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소돔성에 있던 롯의 사위들은 천사를 통해 전해진 그 성에 유황불이 내려 성을 멸하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이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소돔성에 내린 유황불길 속에 소돔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 탄생 후 2천년 동안 이 땅에 계속 선포되고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설이나 신화처럼 그냥 귀 너머로 듣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해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천사를 통해서 구주탄생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목자들은 이 메시지를 그냥 묵살해 버릴 수도 있었고, 설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벌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메시지를 그대로 믿었고, 그 메시지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요즘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며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이 그대로 믿고 가만히 있었는데, 제가 왜 시비야?" 맞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부정 행위라도 있었다면, 요셉이 어떻게 마리아를 데려다 살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이는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을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목자들도 보진 못했고, 단지 천사들을 통해 들려진 음성을 들었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믿고 베들레헴까지 찾아갔기에 구주 탄생의 현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여러분은 귀로 듣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말씀에 대한 반응이 곧 그 사람의 믿음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눈으로 보았거나 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대로 믿었던 것이 목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바를 믿고, 그 결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의 열매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항상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목자들은 메시아 탄생의 소식을 듣자 즉시 예수님께 찾아가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16절). 목자들은 천사들을 통해 선포된 메시야 탄생소식을 믿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듣자 '빨리 가서'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찾아뵙자고 합니다. 그런데 메시야께 찾아가려면 지금 자기들이 하던 일을 제쳐놓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지금 밤잠도 자지 않고 지키는 소중한 양떼가 그대로 들에 있었지만, 아무리 양떼가 중요해도 구세주께 나아가 경배 드리는 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자들은 구주탄생의 소식을 듣자, 예수님께 나아가 경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면 바쁜 대로 먼저 그 일을 보고,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먼저 사람을 만나고 나서, 시간이 나고 한가해지면 하나님께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계절에 따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의 숫자가 오르락내리락합니까? 날씨 좋으면 놀러나가고, 날씨가 궂으면 마땅히 갈데 없으니 교회나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여가해소일 수는 없습니다. 내 일을 다 보고 나서 한가할 때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내 삶에서 최우선으로 챙겨야 할 일이 하나님을 뵙는 일이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찾아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 그런데 메시아께서 탄생하신 곳을 가보니까, 변변한 여관방도 아닌, 마구간에 태어나셔서 지금 구유에 누워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았을 때, 저들은 매우 실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실망하거나 의심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20). 목자들은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가 메시아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고서 양떼 곁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 아기가 비록 말구유에 계시지만 그분의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보고서, 이분이야말로 만민을 구원할 구세주이심을 깨닫자, 이 사실을 인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목자들은 메시야에 대해 듣고 본 것을 인한 감격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참된 찬양은 신앙의 체험에서만 우러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노래 잘한다고 찬양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이 진정한 찬양을 합니다.
셋째, 목자들은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눅2:17).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고들은 것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메시야가 오신 사실을 깨닫자, 그 사실을 자기 마음에 품고 있을 수 없어, 그들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전합니다. 자기들이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들 목자들은 성탄 메시지의 최초의 전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이야말로 온 인류에게 미칠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영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이 없더라도 인류는 계속 생존한다. 러시아 사람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과학이 없어도 문제가 없고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아무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비밀이 여기 있다. 모든 역사가 여기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합니다. 복음에는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 승리의 소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인류에게 미칠 가장 기쁜고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목자들이 메시아 탄생의 소식을 전했을 때, 이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18절입니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여기서 '듣는 자'란 일반 청중을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 여겼다'는 말은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듣고 그냥 '신기하게 느꼈다'을 뿐, 그 이상 다른 반응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목자들에게 성탄 메시지를 전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어떤 감동을 받고 공감은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이 왔다면, 이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마음이 흥분되어 입으로 수다를 떠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C.J. 매허니는 말합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하여금 생각을 지도하게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감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고,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서가 우리 삶에 임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최종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권위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것이다." 천사들을 통해 선포된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도 잠시 신기하게 여겼을 뿐, 꼼짝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무리들처럼, 우리도 복음을 듣고 잠시 마음에 작은 감동을 느낄 뿐, 어떤 구체적인 응답이 없다면, 그 복된 소식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마리아의 반응입니다. 19절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2:19). 이 말씀이 영어성경에는 'But'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자들이 전한 내용을 그저 신기하게만 여겼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의 말에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먼저 그들의 모든 말을 '마음에 지켰고', 그 다음에 '생각'하였습니다. 그 뜻은 말씀을 받아서 마음에 간직한 다음 계속해서 그것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고 '그것 참 좋은 말이지'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목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마리아는 지켰을 뿐만 아니라, 곰곰이 되씹어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목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간직하고만 있지 않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자들에게 전달된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전달된 메시지의 내용은 같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베들레헴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의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시고 나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가운데 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전해진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주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크리스마스를 맞는 우리의 가슴엔 찬양과 감사가 흘러 넘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 성탄을 맞으면서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처럼 선물타령이나 하거나, 모여서 즐거운 파티를 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될 것입니다.
1968년 6월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의 한 심리학 교수가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을 조사했습니다. 조사한 결과 지갑을 되돌려준 경우가 평균 45%로서,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였지만 꽤 많이 주인에게 돌려줬습니다. 조사를 하던 중 유독 6월 4일에는 단 한 개의 지갑도 돌려지지 않았음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날은 차기 대통령후보로 유력했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 당한 날이었습니다. 나쁜 소식이 전해지면 사람들의 행동이 부정적이 된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소식은 지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매일 나쁜 소식만 들으며 살아가기에 우리 마음이 그토록 각박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기쁜 소식을 품고 좀더 마음 따뜻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는데 노 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면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가져다주는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며 기도해줬습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수도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믿음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돌봐주던 로라가 죽어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헬렌 켈러(Helen Keller)이고, 그 선생님이 앤 설리번(Ann Sullivan)입니다. 로라는 앤과 함께 있어주고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주며 헬렌이 하버드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며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습니다. 헬렌은 말합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거예요.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설리번 선생님을 보고싶어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목자들은 구주탄생의 소식을 그대로 믿었고, 예수님께 달려가 경배 드리며, 듣고 본 바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게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경배 드립시다. 그리고 이 복된 구원의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