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짐을 져주십시오

2020-07-26 232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갈라디아서 6장 1~5절

설교요약 :

"서로 짐을 져주십시오!"
2020년 7월 26일 주일예배
갈라디아서 6 : 1 - 5 ; 시편 68 : 19


미국의 한 미식축구 코치가 2년째 성적이 계속 부진하자, 인기가 떨어지면서, '왜 성적이 그 모양이냐?'는 비난만 듣고, 나중엔 친구까지 없어지면서, 거리를 지나가도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더랍니다. 이 사람은 '언제 해고될까?' 그것만 생각하며 마음이 너무 비참해졌습니다. 그때 보니까 자기에게 꼬리치고 반겨주는 것은 자기가 기르는 개 밖에 없더랍니다. 아내도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기에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함께 해주는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정말 이 개밖엔 내게 친구가 없소." 그러면서 아내가 자기에게 그렇게 대해주길 기대하면서 "내게 이런 친구 하나만 더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소"하며 아내 얼굴을 쳐다보자, 아내가 웃으면서 "Ok, 알았어요"하더니, 그 날 저녁에 개 한 마리를 더 사오더랍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거지가 랍비의 집 앞에서 몇 달 동안 목욕을 못한 채 온몸이 가려워 담벼락에 등을 비벼대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거지를 불쌍히 여겨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힌 후 풍성하게 음식을 대접해 보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약삭빠른 다른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 담벼락에 등을 비벼대면서 배고픔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버럭 화를 내며 거지 부부를 쫓아냈습니다. 거지 부부는 다른 거지에게 했던 일을 얘기하며 왜 우리에겐 이렇게 대하느냐 항의하자, 랍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번 거지는 혼자였기에 담벼락에 등을 비빌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는 부부이지 않은가? 가려우면 서로 긁어주면 되지 않는가?" 사람 '人'자는 두 기둥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누구나 무거운 짐과 결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타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살아나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건장한 28명의 남자들이 모두 삭발하고 해맑게 웃는 사진이 있습니다. 어딘가 우스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사진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가운데 인물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여든 아홉 살인 조지 H.W.부시 전 대통령입니다. 고령의 전직 대통령이 갑자기 삭발한 모습을 공개하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건강상,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나?'라는 추측이 흘러나왔으나 진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당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자기 곁에서 비호처럼 위험을 막아주던 비밀경호대원 존의 아들 패트릭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작 두 살배기인 아이가 백혈병 때문에 머리를 밀었다는 사실에 가슴아파하던 그는, 자신도 머리를 밀기로 결정했습니다. '넌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존의 동료들도 여기에 함께 동참한 것입니다.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삭발을 감행한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입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말씀하고, 5절에선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6:5)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짐'이란, 세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로 인해 스스로 감당해야 할 형벌이나 책임입니다. 둘째는 살아가는 인생의 현장에서 감당하게 되는 노동이나 수고와 시련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져야할 의무입니다. 우리 말로는 모두 같은 '짐'이라는 말로 쓰여 있지만, 이 말씀이 원어로는 2절의 '짐'은 [바로스(Baros)]로, '죄의 값'이나 '삶의 수고'와 같은 뜻이고, 5절의 '짐'은 [포르티온(Fortion)]이란 단어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과 봉사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무거운 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첫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은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짐 혹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생활의 무겁고 힘든 짐은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나 혼자 지겠다는 것은 용기나 지혜가 아니라 만용과 무지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이 힘들어하며 이 짐을 주님께 맡기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어느 여의사의 간증입니다. 처음 그녀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마약을 시작했으나 결국엔 17년 동안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녀는 자포자기에 빠져 강둑을 걸어가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 혼자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일어섰을 때,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내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론 마약에 대한 욕망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회복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허무한 데 굴복하는 상태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지로 그렇게 오래도록 노력했지만 실패했는데, 주님이 일순간 마약을 끊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겨야 할 가장 우선적인 짐은 죄의 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를 잡고 자기 몸을 물에서 끌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무거운 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면, 주님께서 눈과 같이 희게 해주십니다.


다음으로, 우리 삶 속에서 자신이 감당 못하는 힘든 짐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나라 선교 초기, 한 미국 선교사가 지프를 타고 시골을 가는데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차에 타시라고 권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사양하다가 고맙다고 올라탔는데, 백미러로 뒤를 보니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기에 "할머니, 무거우실 텐데 그 짐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하자, 할머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내가 자동차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보따리까지 태워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품에 있으니 우리의 근심걱정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 짐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다. 내 무거운 짐도 다 하나님께 맡길 일입니다.


둘째,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의 짐은 피하지 말고 져야 합니다.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했고, 5절에선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감당해야할 책임과 일이 있습니다. 가장은 가족을 부양해야할 책임, 주부는 가정을 돌봐야할 역할, 성도는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책임이 있으며, 또 시민으로서 책임도 있습니다. 내 일을 내가 감당 않으면, 누군가 내 대신 수고해야 합니다. 짐을 지지 않고 편한 길만 찾으면 허무와 공허 밖에 남지 않습니다.


유조선이 기름을 실러 갈 때, 아무 것도 싣지 않은 빈배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탱크 속에 바닷물이라도 채워야 배가 중심잡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밑짐'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Ballast'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밑짐이 있어야 인생의 항로에서 표류하지 않고 안전하게 항해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짐이라면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묵묵히 감당해 나갈 때, 결국에 가서는 이것까지도 내게 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까지도 서로 져주며 협력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마땅히 자신이 짐을 져야하지만 도저히 혼자선 역부족일 때, 짐을 서로 져주라고 합니다. 또 고통이나 비난도 함께 나눠지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되자,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그녀는 얼마나 괴로울까?'하며, 비난하지 않고 짐을 함께 져주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말은 '교통', '통신' 등으로 쓰여지지만, 인간관계를 표시하는 넓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선물, 짐, 책임'을 뜻하는 'Munus'에, '함께'를 뜻하는 'Com'이란 접두사를 붙인 합성어로서 'Communus'는 '선물을 서로 나눈다, 짐이나, 책임을 함께 진다'는 뜻이 됩니다. 어떻게 친구나 이웃과, 인종과 민족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까요? 그것은 이 말의 어원처럼, 짐을 서로 나눠지는 데에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자 루이스 쉐릴은 "인간관계의 성패는 기술적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태도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을 짐을 함께 질 수 있습니까? 첫째, 중보기도로 이웃의 짐을 나눠지게 됩니다. 성경은 기도응답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자기 욕심을 위한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이웃을 위한 기도는 기뻐하십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유대속담에도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성도가 관절염에 디스크로 걷기조차 힘든데, 둘째 딸이 남편 회사 부도로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래서 딸의 빚을 갚아주려고 살던 집을 내놓았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 끙끙 앓다가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금식하며 작은 딸의 부채와 자기 건강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금식 5일째 기도 중에 '밖에 나가면 네 딸과 똑같은 모습의 여자가 있을 테니 그 여자를 위해 기도하면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는 음성이 들려 밖에 나가니 정말 자기 딸과 똑같은 모습의 위암말기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를 성전에 데려다 밤새워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그 자매가 배아프다며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하는 말이 "화장실에 가니 피가 쏟아졌어요. 이젠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아프지 않아요"라면서, 암을 고침 받았고, 자기 몸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금식을 마치고 집으로 왔더니 부동산에서 연락이 와서 작은 딸의 부채도 갚게 되었고, 새로 시작한 사위의 사업도 잘 되었습니다. 자기 딸과 같이 불쌍한 자매를 위해 기도했더니, 그 자매의 병과 자기 병도 고침 받았고, 또 딸의 부채와 사업문제까지 해결되었다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둘째, 무거운 짐으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와 격려로 짐을 덜어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피곤한 몸으로 들어오는 남편에게 "여보, 요즘 힘드시지요? 당신 고생하는 것 다 알아요"하고 위로하는 아내의 말 한마디와, 아내가 아이들과 집안 일에 쉴 틈 없이 고생할 때 "여보, 내가 당신 덕분에 살고 있소. 조금만 참으시구려.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라는 남편의 한 마디에 아내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셋째, 실제적인 도움으로 짐을 나눠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병들이 몸이 불편할 때, 찾아가 간병해줌으로 아픔의 짐을 나눠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교우를 위해 반찬을 해다 주기도 하고, 상갓집의 문상객 접대하는 일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강도가 출몰하는 곳으로 다녔느냐?'고 따지지 않고,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어 치료해 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5)며,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짐을 나눠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는데, 여기 '그리스도의 법'이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대로, '형제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가 왜 삶이 공허하고 허무하게 느껴집니까? 그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주님 말씀이 성취되면, 우리 삶은 활기를 띄고, 큰 보람과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형제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짐으로 주님이 명하신 그 사랑의 계명을 이루게됩니다.


군터라는 마을에서 여러 자녀를 부양하던 한 어머니가 죽자, 그 가족을 돌봐야 할 무거운 짐이 열일곱 살도 채 안 된 맏딸의 가냘픈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그녀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가사를 도맡아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에 보내는 모습을 보고 친구가 칭찬하자 "나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네가 꼭 해야한다는 법도 없어. 넌 이 집에서 뛰쳐나갈 수도 있었어." 친구의 말에 그녀는 말합니다. "그래, 그 말은 맞아. 하지만 내 내면에서 들리는 '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외면하니?" 우리 내면에는 '해야 한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을 따라 해야할 일을 하며 살아갈 때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질 때, 그것이 내게 유익으로 돌아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면 하나님은 후하게 갚아주마 약속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남도 살고 나도 삽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면, 주님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고, 영혼이 충만해집니다. 어떤 젊은 여성이 투신자살하려고 강물로 뛰어내렸는데, 근처에 있던 한 청년이 그녀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수영할 줄 모르는데, 생명을 구하려는 생각에 자기가 수영 못한다는 사실도 잊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곧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이 되었는데, 이 모습을 본 여성은 자신이 자살하려했던 것도 잊고 그 청년을 물가로 끌어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살려고 하다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셋째, 내가 형제의 짐을 나누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너지 효과를 초래합니다. 바울은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9:2)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크게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고린도교회는 이 말을 듣고 열심히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를 했더니, 이 소식이 퍼져나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이 일에 동참하고 이웃이 어려움을 돕는 사랑의 물결이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작은 선행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켜 더 많은 사람들로 이 일에 참여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짐을 져주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첫째, 나의 작은 도움으로도 그가 일어날 것을, 내가 돕지 않음으로 그는 아주 쓰러져버릴 수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10). 혼자 힘으론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지만 누군가 조금만 도와두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데, 아무도 돕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작은 관심과 사랑으로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을, 나의 무관심 때문에 그 사람이 영영 넘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졌던 사람이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힘들어할 때 그를 돕지 않으면 내가 힘들 때,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지게 됩니다. 잠언에는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고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람과의 사이'로 '서로 의지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도 돕지 않으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도울 자도 없으며, 그 자체가 인간 됨의 포기입니다.


나귀가 짐을 잔뜩 싣고 고개를 올라가는데 힘에 부쳐 죽을 지경이라 간절하게 함께 가는 노새에게 애원했습니다. "노새야, 너는 나보다 튼튼하니 내짐을 좀 덜어 다오. 나는 죽을 지경이란다." 노새는 나귀의 애원에 코웃음 쳤습니다. 결국 나귀는 쓰러져 죽고 말자, 주인은 나귀의 짐과 나귀의 시체까지 노새에게 얹어놓았습니다. 노새가 헐떡이며 죽을 지경이 되자, 그제야 후회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나귀가 애원할 때 짐을 좀 덜어주는 건데, 그랬으면 나귀도 살고 나도 살 것을 이제 나까지 죽게 되었구나!" 남이 어려울 때 돕지 않으면 나를 도울 자도 없어집니다.


셋째, 서로 짐을 져주지 않으면 그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서로 힘을 합치면 능히 이길 수 있는데, 한 사람이 어려울 때 아무도 돕지 않으면 함께 공멸하고 맙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화목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나뭇단을 하나씩 나눠주며 말했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 이 나뭇단을 묶은 그대로 꺾어보아라." 두 아들은 서로 나뭇단을 꺾어보려고 했지만 꺾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아버지는 그것을 풀어 나뭇가지 하나씩을 나눠주며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보라"고 이르자, 아들들은 쉽게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서로 화목하면 나뭇단처럼 힘이 있게 되고, 서로 싸우면 모두 다 망하고 만단다."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경기 때, 스타디움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벗기는데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가 살아서 몸부림치는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 도마뱀이 못이 박힌 벽에서 움직이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인을 알기 위해 철거공사를 중단하고 사흘 동안 도마뱀을 지켜봤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짓는 집의 지붕 틈새를 기어다니다가 판자에 눌려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못하게 됐을 때, 그 위에 못까지 박히게 된 도마뱀은 얼마나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겠습니까? 도마뱀은 원래 사람에게 꼬리가 잡히면 그 꼬리를 잘라버리고 도망치는 파충류인데, 그 도마뱀은 꼬리도 잘라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을래야 죽지도 못하는 절망 속에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격적인 것은 바로 곁에 있던 도마뱀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도마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 도마뱀이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절망할 때, 어딘 가로 가서 먹을 것을 물어다 입으로 건네주면서 "절망하지 말라고, 살아야 한다"며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 눈빛 그 표정으로 못에 박힌 도마뱀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나 혼자 살기 위해 너를 버리고 떠나갈 순 없다'며 어두운 지붕 밑에서 두 도마뱀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고통 속에서 서로 안고 잠이 들곤 하였을 것입니다. 이 두 도마뱀의 사랑이 3년의 긴 세월을 이겨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해도, 서로 이처럼 아픔을 함께 나누며 곁에 있어 줄 사람만 있으면 이 세상은 살만한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로마의 카타콤의 한 동굴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나는 육십 삼 세까지 살 수 있었소."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많은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캄캄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면서도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능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우리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순수한 기쁨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었던 이 아름다운 교제와 섬김으로 우리의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었고, 우리는 그 많은 어두움과 슬픔의 길을 헤치고 여기까지 걸어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교제를 맛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주일 아침 설교가 끝나면 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맡겨주신 그 사명과 책임의 짐을 묵묵히 지고 나갑시다. 그리고 이제 형제의 무거운 짐까지도 함께 나눕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68:19).

갈라디아서 6장 1~5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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