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9 61회
“마음을 합쳐 하나가 되십시오”
2018년 8월 19일 주일예배
빌립보서 2 : 1 - 11 ; 에스겔 11 : 19 - 20
근래 남북 화해무드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인지, 요즘 병무청홈페이지에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온다고 합니다. “곧 입대해야 하는데,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군대 안 가도 되거나, 복무기간이 줄어드나요? 그렇다면 최대한 늦춰보려고요.” 이에 대한 병무청 대답이 재밌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세요. 지금은 아무리 멀어야 강원도지만, 조금 더 있으면 백두산이나 개마고원으로 가야합니다. 빨리 가는 게 최선입니다.” 통일만 된다면, 어디에서 군복무한들 문제이겠습니까?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2015년 10월 이후 약 3년 만에 치러지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20일부터 2박 3일간은 남측방문단이 북측 가족을 먼저 만나고, 24일부터 사흘 동안은 반대로 북측방문단이 남측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1988년부터 이산가족으로 등록한 13만2천603명 가운데 화상을 포함하여 상봉이 이뤄진 건 2만6천392명(19.9%)뿐입니다. 반면 이산가족 신청인은 점점 고령화하고 수도 줄고 있습니다. 지난달 31일까지 집계된 이산가족 생존자는 총 57,059명으로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3,454명(5.7%) 감소했습니다. 부모 고향이 평안남도 중화군인 실향민 2세 진원철씨(67)는 “1985년 이후 27차례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마다 부모님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표현은 안 하셨지만 이번에도 많이 아쉬워하신다. 생사를 모르는 고모들을 만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굴뚝같지만, 고작 며칠 간 만남으로 60년 세월의 생채기가 회복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했습니다. 남북분단으로 인한 가족의 생이별은 속히 종식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8.15광복절 대통령축사에서 “향후 30년 간 남북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최소한 17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 간에 전면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때 그 효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KBS남북교류협력단이 실시한 2018 국민통일의식 조사에서 ‘큰 부담만 없다면 통일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이 45.6%로 나왔고, ‘상당기간 현 공존상태를 유지해야한다’는 응답이 25,1%, ‘반드시 통일돼야 한다’는 응답이 20.4%로, 긍정적 응답이 전 국민의 3분의 2인 66%였습니다. 문제는 통일비용인데, 현대경제연구소는 10년 간 약 188조 4000억 원으로 보았는데, KBS조사에서 국민들은 73.7%가 ‘개인부담 할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북한의 지하자원이 2014년도에 북한자원연구소에서 6,500조 원이라는 추정치를 내놨는데, 2012년에는 시장가치로 1경 원 이상으로 추산도 했습니다. 통일 이전에, 남북이 싸우지 않고 상호신뢰가 조성되어 자유왕래만 이뤄져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같은 민족이 하나되지 못하고 있음이 이토록 아쉽고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초대대통령 취임식에서 사용하여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간행했던 ‘펜실바니아 가제트’ 지에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Join, or Die)는 말로 실렸는데, 20년 뒤 일어난 독립전쟁시에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첫째, 분열은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서로 친밀한 교제와 사귐을 통해 인정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이웃과 교제가 단절되면, 물질적인 모든 필요가 다 채워져도 인간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서로간에 갈등을 겪거나, 교제가 깨어지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범죄케 하여 분열시킵니다. ‘마귀’란 말은 헬라어로 ‘사이’라는 뜻의 [디아](dia)와 ‘던지다’(throw)는 뜻의 [볼로스](bolos)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마귀란 ‘사이에 던지다’는 뜻으로, 사람들을 나누고 형제를 참소하는 일을 합니다. 사단의 전공은 나누고,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그의 본업입니다.
둘째, 분열은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힘의 역학 관계는 힘이 한 곳으로 모아질 때, 극대화됩니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분산되거나,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게 되면, 그 힘은 무력화되기에, 힘이 하나가 될 때만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인의 숫자가 천주교에 비해 훨씬 많은데도, 그 힘이 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주교회는 중앙 집권제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 비해, 개신교는 교단이 분열되어 있고, 개 교회 중심이라서 힘이 하나로 모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세상에서 오합지졸로 보여,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분열은 공멸을 가져옵니다.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다투면,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모두가 망하게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도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65년간 전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이에 한번이라도 전쟁이 터졌다면 남북한은 누가 이겼더라도, 6.25 직후처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알바니안들이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점차 자리가 잡혀가자 저들끼리 조그마한 알바니안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 ‘교포교회’에 날이 갈수록 싸움박질을 하며 교회가 분열하게 됩니다. 그런 때에 한 나이 많은 교인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고통과 핍박을 주시옵소서. 터키로부터 그 많은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하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핍박이 없으니 이렇게 분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핍박을 주시옵소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입니다. 이곳엔 회당도 없어, 안식일에 기도하러 강가로 나갔다가 자색옷감 장사하는 여자사업가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 세운 교회로, 주로 여성이 주도했던 교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여성 중심의 교회라서 장단점이 모두 있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면 다른 교회에서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교회는 여성적인 교회라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울을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들으면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힘드실까?’ 이런 생각으로 위문금을 모아서 그것을 저희의 목사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며, 바울을 잘 보살펴달라고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여성적인 빌립보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런가하면 단점도 있었는데, 이것은 여성의 약점인 질투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사를 경쟁적으로 보고, 질투하고 시샘하다 보니 그만 교회가 화목을 잃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 바울의 마음에 걱정이 되었지만 직접 대놓고 ‘왜 싸우느냐? 하나 돼라’하고 책망하지 않고 대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2절)고 권하였습니다.
지금 빌립보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저들의 마음이 하나되지 못한 때문입니다. 환경이 어떻고 입장이 어떻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만 하나되면 다른 것도 모두 하나될 수 있는데,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가정도 풍비박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하나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일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교도의 핍박 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치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교회내의 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하나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첫째, 상대방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더 잘났다는 교만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를 인정하면 얼마든지 하나될 수 있는데, 돼먹지 않은 자기 우월감과, 상대방에 대한 비하가 둘 사이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연구해 보면, 기독교가 처음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얼마 안 가서 세계적인 종교로 뻗어나가 대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기독교가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여기에 큰 공로자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가 노예요, 다른 하나가 여성입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는데, 당시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팔고 사고 죽이고 맘대로 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요 가축에 불과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노예들을 교회에서 한 형제로, 같은 지체로 영접했습니다. “너와 나는 같다”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인 것이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게된 요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여성입니다. 옛날에 여성의 위치는 형편없어 인구 조사할 때 세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 기독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은 존재로서,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가르쳤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선 ‘양반과 상민’이라는 반상의 차별을 두어 사람은 그 뿌리부터 우수한 종자와 열등한 종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어느 고깃집에 한 양반은 찾아와 “어이, 김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하면 넉넉하게 고기를 잘라주는데, 다른 양반은 “야, 이 백정아, 고기 한 근 잘라라!”하면 아주 인색하게 고기를 잘라주니, “왜 내 고기는 저 양반 것보다 적으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 저것은 김서방이 잘라서 그렇고, 이것은 백정 놈이 잘라서 그렇습니다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자기만 잘났다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차별의식이, 하나되는 것을 무너뜨립니다.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의 한 초등학교에 젊은 여교사가 새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녀는 도시에서 가르치던 대로 수업시간마다 매일 학생을 지명하여 산수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임해온 첫날부터 며칠이 지난 후에까지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게 했지만, 우두커니 칠판 앞에 서 있을 뿐 누구도 산수 문제를 푸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선생님이 시키는데 문제를 풀지 않는 거니?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해야 선생님이 가르쳐 줄 거 아니니?” 아이들은 당황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용기 내어 선생님께 이야기했습니다. 아이의 대답은 선생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제가 풀면, 이 문제를 모르는 다른 친구가 실망할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다. 인디언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여 친구 중 산수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 아이들은 나서서 문제를 풀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일치를 이룹니다. 4절 말씀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서로 자기 일만 열심히 하여 내 밥은 내가 먹고, 남의 밥은 그가 먹으면 아무 문제없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환경과 여건의 차이로, 세상에는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두 자기만 잘살려고 하면,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모두를 힘들게 하고, 끝내 모두 망하게 되고 맙니다. 내 스스로 내 일에 열심히 해야지 만,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부상당하여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감독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인 밥 호프(Bob Hope)를 이 공연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나 바쁜데다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밥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해 주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하다”라며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밥 호프도 끈질긴 감독의 부탁에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최측에선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하여 밥 호프는 그 위로공연에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공연 당일, 5분을 약속하고 올라간 밥 호프가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웃기 시작하는데, 밥 호프는 5분이 지나, 10분, 15분, 25분이 넘었는데도 공연을 계속했습니다. 밥 호프는 거의 40분이나 공연하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5분 공연하기로 하고 40분을 한 경위와 눈물 흘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밥 호프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보니까 앞줄에 상이 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데,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오른팔을 잃은 사람은 왼팔을,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을 가지고 함께 박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밥 호프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저 두 사람은 내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슬픔과 고통 많은 세상에서 서로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이웃들의 허물을 덮고 서로를 배려하는 정신을 배워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던 동일한 마음을 구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묵어줄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셋째,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로 마음이 모아져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과 지향해야 할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내 뜻을 따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일치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울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내 뜻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것은 패배나 굴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곧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모두 하나가 됩니다.
생텍쥐페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오로지 상대방만을 주시하고 그만을 그리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에게 집중하려 합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있던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한 목표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생각은 한 발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호흡을 맞춘다면 두 사람 사이의 어떤 문제도 해소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옳다’는 개인적 자존심을 위해 ‘우리의 관계’를 희생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논쟁에는 이겼지만 친구를 잃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적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신이 옳아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칫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치를 가로막는 많은 부당한 환경과,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자존심, 혹은 경쟁심이 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성도의 연합에 대하여 이런 귀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우리가 지닌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면서, 자기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돕고 서로를 위해 기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화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일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링컨은 교회 지도자들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대통령의 도움을 청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사회자는 문제를 설명한 후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므로 대통령께서도 우리의 편에 서실 것을 믿습니다.” 이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문제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이것의 옳고 그름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한 가지 제 소신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이 내 편에 서 계시다는 생각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날마다 드리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오직 내 편이라든지, 내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링컨이 남북전쟁을 치른 후 그토록 험한 분열의 과제를 해결해내고,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묶고서, 적이었던 이들조차 함께 손잡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내가 하나님 편이 되고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입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상대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상대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자를 골랐어.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게끔. 그런 거지?” 적당한 거리는 안전하지만 언제나 타인입니다.
세상은 무한경쟁 속에서 1등만 기억하고, 2등은 꼴찌와 같습니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탈진한 1등과 허탈한 꼴찌가 끝도 없는 경쟁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남매가 하나뿐인 운동화를 돌아가며 신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교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달리는 ‘천국의 아이들’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린이 달리기 대회에서 3등 상으로 운동화를 상품으로 내걸자, 오빠는 그 운동화를 여동생에게 주려고 달리기 대회에 참가합니다. 그런데 그만 환호와 박수소리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1등을 해버려 운동화를 못 받게 되었습니다. 1등의 영예와 함께 더 좋은 선물을 얻었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년의 얼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동생에게 운동화를 마련해주기 위해 달렸던 오빠에게 1등의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형제 우애가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닐까요?
이현주 목사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엇을 버릴까?]라는 시입니다.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네//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설레이는 두물머리 깊은 물에서/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자신의 욕심도 자존심도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되어 함께 흘러가는 이 민족과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론 이 땅에 참된 평화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굳은 마음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서로 존중히 여김으로 일치를 이룹시다.
파울로 코엘료의 글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런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형제와 하나 됨이 참된 사랑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참된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한 마음이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우리의 하나 됨을 통하여 우리 주님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냅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