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창세기 3장 8~13절

설교요약 :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
2018년 6월 3일 주일예배
창세기 3 : 8 - 13 ; 요한복음 12 : 26


아담과 하와가 어린 가인과 아벨에게 에덴동산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온갖 새들과 짐승들과 놀 수 있으며 많은 과일들이 많아서 애써 일하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곳이란다."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곳에 살고있죠?" 아담이 말했습니다. "그게 너희 엄마가 다 말아먹었단다."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나중엔 함께 먹었으니 둘 다 책임이 있는데, 이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서 낙원을 잃고 말았습니다.


'만물유위'(萬物有位)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제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서 제 구실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외도나,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사탄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유1:6)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곧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길]이란 작품에 보면, 한 방탕한 남자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집을 뛰쳐나가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온 몸이 병이 들고 오갈 데가 없게 되자,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에 돌아오는데, 집안은 불이 밝게 켜져 있고 찬송을 부르며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집안을 보며 자신을 바라 볼 때,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집 주위를 서성이다가 추위에 길거리에서 얼어죽고 맙니다.


다윗의 일생일대의 실패는 밧세바와의 부정을 감추려고 충신 우리야를 죽인 일인데, 그 원인은 모든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한가하게 왕궁에서 늦잠 자고 일어나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유혹 받았던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다가 죄짓고 말았습니다.


1944년, 독일 군대에게는 연합군의 불란서 상륙이 예견되어 있었기에 불란서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 해 6월 4일 독일의 명장 롬멜(Rommel)은 불란서 서부 해안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날 기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불란서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기에 롬멜 장군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며칠 간 아무 일도 없겠군". 그때 그는 갑자기 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 생일이 6월 6일인데...." 그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부관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전선을 이탈하여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의 생일인 6월 6일 바로 그 날 연합군의 불란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연합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고, 독일에게는 패배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롬멜 장군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절대 소홀할 수 없는 전선 방어의 그 중요한 책임을 망각했던 그 순간에 나치 독일에게 패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질문입니다. '아담'은 한 사람의 이름인데, 히브리말로 '에돔'은 '붉다'는 형용사이고, 이것이 명사로는 '흙'이기에 "아담아!"라는 이 말씀은 '흙덩이야!', 혹은 '인생아!'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는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는 어리석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담에게 물으시는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지금 아담이 처한 상태, 타락한 그의 실존의 자리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제가 범죄하여 여기 있습니다"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저들에게 스스로 처한 형편을 깨닫게 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자 '네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라'고 물으시는데, 그들은 지금 타락한 자기들의 현주소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1954년에 별세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이 내 집 창문 가에 와서 나를 부를 때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라고 불렀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면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아담을 찾으시는 음성처럼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그는 흰머리를 어깨 위로 날리고 책 한 권을 들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산책을 즐겼는데,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여 늘 말동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양심을 괴롭혔던 것은 1939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개발을 진언하여 일본에서 엄청난 살상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긴 했으나, 아이들이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라고 부르면, 많은 생명을 살상한데 대한 가책으로 하나님이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시는 음성 같아서 양심에 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서 세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을 피했습니까? 10절에 보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창3:10)라고 합니다. 아무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나니까,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를 피하듯,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란 말씀처럼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아닌데, 죄짓고 나니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한 남자가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갔습니다. 그는 피땀 흘려 번 돈을 꼬박꼬박 아내한테 부쳐주면서 반드시 은행에 저금하라며, 몇 년만 참고 고생해서 잘살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 돈을 가지고 이자놀이도 하고 증권투자도 하고 해서 꽤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니까 이제는 중동에 있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사기를 당하여 돈을 몽땅 날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남편이 돌아오는 날입니다. 얼마나 즐겁고 반가운 날입니까?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는 날, 이 여인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짓고 나니까 남편이 돌아온다는 가장 반가운 소식 앞에서도 그녀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느끼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었는데, 이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니까,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고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전에는 그토록 반갑고 가까이했던 분이었건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무언가 잘한 일이 있으면, 부모 앞에 쪼르르 달려나와 자랑하는데,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부모 눈치를 보며 실실 피하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리고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고, 숲 속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숨을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잘못이나 죄를 범했을지라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와야합니다. 간첩일지라도 손들고 나오면 살려줍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아이가 옷을 걸어두는 골방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옷을 불이 붙었습니다. 이 아이는 어른에게 알리지 않고 골방 문을 닫고 밖으로 도망쳐버렸습니다. 그 결과 집 한 채가 몽땅 재가 되었습니다. 양심도 이와 같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욕심을 좇아 도망치면 결국 내 가정, 내 사회, 내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셋째,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서 변명과 핑계를 댔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3:11)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여기서 아담은 하와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며 '하나님께서 저 여자를 내게 주셔서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그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시인하지 않고 자기 아내 때문에, 아니면 뱀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 때문에 범죄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좋았으련만 끝내 그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고 정직해야 할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다윗 왕은 분명히 밧세바의 유혹으로 잘못을 저질렀지만, 다윗의 그 많은 참회록 중에는 '그 여자 때문'이라는 말이나, 단 한마디 변명이나 책임전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으실 때 믿음의 사람들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모세와 사무엘과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힌네니'인데, 이 말은 '보라!'는 감탄사로서 '보십시오, 나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 '힌네니!'라고 응답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도 '내가 여기 있다'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는 말씀 앞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며, 우리가 반드시 대답해야 할 그 자리는 과연 어디입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우리의 믿음의 자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140:13). 인간은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함으로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면 잘 사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산소호흡기에 의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내일 죽을 사람을 보고 잘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리빙스턴은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모든 일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명이 내일에 대한 해답 없이는 언제나 허무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교회에 젊은 목사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성직을 버리고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야심적으로 활동을 펼쳐나갔으나 신앙이 점점 박약해지고 교회와 멀어졌습니다. 친구들이 충심으로 충고했으나 다 물리치고 사회적 명성과 정치적 권력으로 큰 일을 해보겠다고 정계로 나갔는데, 마침내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세 살 난 귀여운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말합니다. "아빠, 저 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한번 읽어보려무나." 딸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만 성경책을 펴들고 읽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박또박 읽고는 자랑스런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견디다못한 그는 딸을 물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 처지에 있지만 진정 주를 사랑합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찾기까지 내게 참 평안이 없더이다"라고 고백한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혼의 평화 없인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바빠서 교회에 못 나오기 보다, 너무 시간여유가 많아서 교회에 안 나오는 일이 더 많습니다. 미국의 신자들의 교회출석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때가, 주 5일 근무를 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자기 여가를 위해 쓸 시간이 많으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릴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백화점을 창안한 존 워너메이커의 '사원에게 고함'이란 1854년도 고시문의 내용입니다. "전 사원에게 알림 : 안식일(주일)에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출근해서는 안됨. 안식일에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며, 이발소, 댄스홀, 각종 주류 판매소에 출입을 금함. 본사 사원은 연간 5달러 이상의 헌금을 교회에 바쳐야 함. 안식일에는 예배는 물론 주일학교 성경 공부반에도 반드시 참석할 것." 지금 같으면 이런 사장은 그대로 고소당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80년 전 미국사회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 성경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 우리 가정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요8:35)고 말씀했습니다. 이 시대의 최대의 위기는 가정의 붕괴입니다. 한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이 무너지면 그 사회가 무너집니다. 요즘 가정을 버리고 길거리를 헤매는 홈리스들이 많아진 것은 경제적인 이유만 아니라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진 탓입니다. 전에는 결혼하면 어떤 경우에도 평생 해로했는데, 요즘은 조금만 뜻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분방한 성 모럴과, 빗장을 풀어버린 가족제도에 대한 지나친 개방이 많은 가정을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가장과 남편으로서 도리는 다하지 않고 항상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집에 와서는 잠든 아내를 깨워 저녁밥을 먹곤 했습니다. 그 날도 밤늦게 술 마시는 저녁밥을 먹기 위해 벨을 누르려다, 그날 따라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보니 한밤중이라 아이들은 저희 방에서 자고 있고 아내도 침실에서 엎드려 자는데 그 앞에 성경책이 놓여있었습니다. '아내가 날 기다리며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나보군.' 그런데 성경책 밑에 노트 한 권이 보였습니다. 그는 순간 그 노트를 보고싶어 조심스럽게 그 노트를 펼치니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남편을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사랑하라 명하시므로 나는 남편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 이 글을 읽으며 손이 떨리고 심장은 멎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고 귀에선 큰 북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서재로 들어가 소리 없이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남편이었는지 깊이 깨닫습니다. "아내가 나 하나만 믿고 살면서 나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내가 믿음 때문에 자기 슬픔을 감추고 나를 웃음으로 대해줄 때 나는 단 한번이라도 진실한 사랑으로 아내를 대한 적이 있었던가? 아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나의 즐거움만 좇아 살아왔던 한심한 남편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이상적인 배우자, 멋진 남편, 괜찮은 남자, 능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그동안 살아왔으니..." 이런 자신이 밉고 부끄러워 한동안 울다가, 이렇게 못난 남편을 위해 그동안 살아준 아내가 불쌍했습니다. 남편 같지 않는 못난 자기 탓에 아내는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울었을까? 한동안 울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기도는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도였는데, 순간 이전과 다른 기도가 나옵니다. 그 때 주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너를 단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단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그때 그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 눈과 귀가 열리며, 가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셋째,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음성에, "주님 누구시니이까?"하고 묻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행22:8)는 말씀에 즉시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22:10)고 자기 사명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책임과 사명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이것이 싫어서 이를 피해 달아나 버리면, 필연 풍랑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곧 이 땅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명을 버리고 자기 안일과 이기적인 욕심만 찾는다면, 이 땅에 더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위임식이나 항존직 임직식 등이 있는데, 이런 행사 때는 외부에서 목사님들이 오셔서 축사나 권면의 말씀을 해주는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가 많다 보니까 너무 장황하게 하여 눈총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한국 교회사에 남는 짧고 강력한 권면이 전해져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 위임식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제단을 비우지 않는 목사가 되시오"라는 단 한마디 권면을 하신 것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임택진 목사님이 어느 교회 장로 장립식에서 "예배에 빠지지 않는 장로가 되시오"라는 한마디 권면을 하신 말씀도 유명합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제단을 비우지 않고 지키는 것 이상의 교회에 대한 봉사가 없고, 항존직 직분자로서 교회의 모든 공식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귀한 자세도 없는 줄 압니다.


[다행이다, 아침이 온다]는 책을 쓴 '김해영' 선교사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난 지 3일 만에 아버지가 내던져 척추장애를 입어 평생 134㎝ 키로 살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정신 이상이 된 어머니와 다섯 남매를 두고 그 아버지는 목숨을 끊었습니다. 조금만 앉아있어도 끊어질 것 같은 허리 통증을 겪으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던 그 소녀에게 '아침'이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녀를 일으킨 건 소녀시절 공장에서 일할 때 공장 사장이 "너는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닌데"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이 교통사고로 32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자기를 인정해주었던 말에 그녀는 노력하여, 세계기능대회를 휩쓸었습니다. 20대 중반에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찾아간 곳이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조그만 마을 '굿 호프', 우리말로 희망입니다. 이름 그대로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은 곳이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더 깜깜한 밤을 맞았습니다. "한국에서 이미 죽을 것 같은 경험을 한 후에 '가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보츠와나로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오자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떠나온 그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캄캄한 밤의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걸었습니다. 사막이나 다름없는 그곳의 밤은 매우 춥습니다. 허기와 갈증, 피로, 그리고 추위로 걸음은 점점 느려졌습니다." 그렇게 긴 외로움과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끝에서 그녀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를 보는데,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함께 살자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녀는 의자 두 개를 마련하고 늘 하나님을 옆에 모시고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그녀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치른 값은 너무 혹독했습니다. 운영비가 없어 학교가 문을 닫았고, 권총 강도를 세 번쯤 당했고, 며칠씩 혼자 앓을 때는 그냥 죽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칼로 협박당하고 얼굴과 온몸에 구타당하며, 교통사고는 미미한 일이었습니다. 말할 사람이 없고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정신은 피폐해지고, 영혼은 갈급했는데, 그녀는 '다행입니다', 그것도 천만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아픔과 상처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주님이 동행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어둡고 두렵고 무섭던 밤은 나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시간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어두움의 밤을 보내고있더라도, 묵묵히 주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를 지켜나가면, 그곳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김하인은 [국화꽃 향기]에서 말합니다. "나무는 한 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차라리 말라죽을지라도 말이야.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어. 이 사랑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각자 우리에게 물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면, 우리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며, 임마누엘의 축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13절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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