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누가복음 2장 25~35절

설교요약 :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
2020년 11월 29일(대림절 첫째주일)
누가복음 2 : 25 - 35 ; 이사야 30 : 18


아내가 퇴직한 남편을 '집사님'이라 부른다는데 '집에서 사는 사람'이란 말로서, 기분 좋으면 '장기적으로 노는 사람'이란 '장로님'이라 한답니다. 지인이 요즘 뭐하냐 물으면 '거안실업' 회장이라면 부러워하며 무슨 회사인지 묻는데, 집에서 '거실과 안방을 오가는 실업자 회장'이랍니다. '마포불백'은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인데, 삼시 세끼 얻어먹으려고 이런 '생존비결'을 생각했답니다. 첫째,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 최선을 다한 후 아내의 명령을 기다린다. 둘째, 인명재처(人命在妻), 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달렸다. 셋째, 수신제가(手身제가), 손과 몸을 쓰는 일은 제가 하겠다고 한다. 넷째,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아내와 화목하면 매사가 순조롭다. 다섯째, 지성감처(至誠感妻), 정성을 다하고 아내가 감동하길 기다린다. 여섯째, 순처자(順妻者)는 흥(興)하고 역처자(逆妻者)는 굶는다. 웃자고 만든 말이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인명재천'(人命在天)만은 헷갈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06년에 상영된 영화 '에이트 빌로우'는 1959년 남극기지에서 있었던 실화로 만들어진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남극에서 운석 탐사를 하던 대원들에게 25년 만의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때 8마리의 썰매견과 함께 빙판과 눈밭을 탐사하던 한 대원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탐사대는 서둘러 피신해야했습니다. 탈출용 헬리콥터는 사람이 탈 자리도 부족했기에 당연히 썰매견들을 태울 자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도 겨우 탈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썰매견들은 어쩔 수 없이 방치되었습니다. 대원들은 최대한 많은 먹이를 남겨두고 떠나면서, "어디 멀리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어야해! 꼭 다시 돌아와 너희를 데려갈게"라고 말했습니다. 철수하던 대원들은 개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먼저 탈출시킨 후 돌아와서 개들을 데려갈 예정이었지만 더욱 나빠진 기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극한의 땅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개들을 구하기 위해 대원들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개들을 구출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원들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개들을 구하기 위해 남극에 가려고 했지만, 폭풍을 뚫고 찾아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대원들은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추위와 굶주림에 개들은 죽었을 거야. 그곳에 가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야.' 하지만 그중 한 대원은 썰매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자 힘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지구를 반 바퀴 돌아 175일 만에 남극에 갔는데, 반년이 지났지만 썰매견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변의 짐승을 사냥해 먹으며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서 눈밭을 가르며 달려오는 개들을 끌어안고 이 대원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썰매견들은 그 혹한에서도 자기들을 데리러 올 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째 주일'인데, '대림절'이란 '주님의 강림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을 '강림절'이나 '대강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때부터 교회력은 새로 시작되기에 이 날이 교회력으로는 정월초하루에 해당합니다. 대림절이 되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준비하며,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흔히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종말'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이요, 다른 하나는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이란, 우리가 언젠가 육신이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말하고, 우주적인 종말이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 우주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는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절기를 맞으며,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 신앙의 자세를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고대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수탈 당하며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해 독립을 꾀하며 반란을 일으키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사회는 바리새파다 사두개파다 엣세네파다, 열심당이다 하여 여러 파당으로 갈라져 있었고, 민심은 흉흉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때였기에 어느 때보다도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영접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박사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루살렘 거민들은 소동이나 벌였고, 심지어 헤롯은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지금 재림하신다 해도 사람들의 태도는 그때와 별로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왕좌왕하고 허둥대며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기의 하찮은 기득권이 빼앗길까봐 도리어 대적하려는 자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의 모습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를 본받고자 합니다. 첫째, 시므온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 메시아의 오심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2:26).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는 감격을 맛보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에서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냅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 메시아의 강림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이러한 시므온에게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보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교양강좌나 도덕적인 훈화 정도로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게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므온은 '네가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을 때,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또 이런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그에게 이런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길 간절히 소원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포기한 상태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으나 시므온은 분명한 약속을 받고서,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성탄절이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성탄절에는 석방되리라는 희망으로 견뎌왔는데, 성탄절이 되어도 석방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고서 기대를 포기함으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무참히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수용소 지하실 벽에는 아직도 이런 낙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는다. 단지 그분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여 아무 기대도 소망도 없이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않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커다란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예술품으로 가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썰물 때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나룻배 한 척과 노가 그려진, 어둡고 처량한 느낌이 드는데, 그 그림 밑에는 "밀물은 반드시 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 그림의 사연을 물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러 다녔는데, 어떤 노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았는데, 무엇보다 글귀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 그림과 글씨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노인을 찾아가 정중히 부탁했더니, 그분은 그림을 내게 주셨습니다. 나는 어려움이 밀려와 내게서 무언가 휩쓸어갈 때마다 그림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밀물은 반드시 온다.'" 썰물처럼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삶의 저편으로 밀려가 버려,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나룻배를 다시 움직일 수 없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기대할 때입니다.


둘째, 시므온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 '시므온'이란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 매우 흔한 이름인데, 어떤 이는 랍비 힐렐의 아들이며 가말리엘의 아버지로서,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 '의롭다'는 말은 '공정한', '정의로운'이란 뜻으로 하나님과 신정사회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하다'는 말은 '독실한', '신중함' 혹은 '두려워하다', '경계하다'는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로 볼 때, 시므온은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성쇠의 내부부적인 원인을 분석한 결과, 세계 문명 21개 중에 19개의 쇠망이 전쟁 같은 외부적인 파괴가 아니라, 정신적 부패와 타락으로 큰 문명도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한 문명이 쇠퇴할 때는 사람들의 생각이 부정적이고 희망을 잃게되는 정신적 쇠퇴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가정도 사회도 문명까지도 기울게 됩니다. 환자들은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선고를 받으면 자포자기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폴 트루니에는 말합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비극 중에 하나는 구도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이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신앙의 능력과 경건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메시아의 오심을 확신했기에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의롭고 경건한 생활로, 주님 뵙기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세상에서 생의 위대한 비밀을 깨달은 경건하고 선한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이 주는 기쁨보다 천 배 이상의 기쁨과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멸시를 당하고 박해받았으나 그들은 이런 고난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영혼의 주인 되신 분을 신뢰함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바로 기독교인이며 나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바바리아(Bavaria)의 루드비히(Ludwig) 공작은 사람들을 무시하며 괴롭혔기에, 성안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 갔다가 숲 속의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습니다. 삼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In Three~) 무서운 심판이 있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길 '3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되리라'생각했습니다. 3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죽어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에 3일 째 되던 날 높은 탑에 올라갔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3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공작은 이제 확신을 가졌습니다. '3년이었구나.'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왕실에서 루드비히 공작을 황제로 모시기 위해 사절단이 왔습니다. 3일, 3개월, 3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졌던 것입니다. 공작이 독일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행 때문이었으나, 공작의 선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면,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는 어떠해야할까요?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몇 십 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일 뒤에, 3주 뒤에, 3년 뒤에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하루하루 소망 가운데 경건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메시아를 그토록 대망했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메시아를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눅2:27).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욕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향락과 쾌락을 좇아 세상으로 치닫는 욕망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은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합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합니다. 신영복 교수는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으로 주님 전에 나와 겸손히 예배하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자세는 없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나왔을 때,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나자, 입을 열어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9-32). 시므온은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를 뵈었으니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므온에게 빵이 주어졌습니까, 옷이 주어졌습니까? 아무 것도 달리 주어진 것이 없는데 그가 메시아를 만나자 이것만으로 만족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그것으로 충만합니다. 그토록 사모하며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최고의 행복에 젖어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지고의 행복으로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오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 가지 권면합니다. 첫째, 정신차리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우리는 지나간 과거나 현재에 집착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 앞에 직고하게 될 그 날'에 두고 하나님을 뵈올 준비를 위해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얼마나 선하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기도하느냐?'는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둘째, 열심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뜨겁게 사랑하라'라는 뜻은 말이 열심히 달리는데 기수는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주마가편'을 뜻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더 뜨겁게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용서하며, 허물이 안보일 때까지 사랑하라, 모든 죄를 덮을 만큼 사랑하라, 허물이 기억되지 않을 때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셋째,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봉사'라는 말은 '예배'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직분도 은사이기에 각기 맡은 직분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30대 남자가 셋방살이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10년 간 허리띠를 졸라가며 아끼고 아껴 변소가 밖에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샀더니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변소가 밖에 있어 여간 불편하지 않아, 또 10년 간 아끼고 절약하여 집안에 화장실 있는 아파트를 샀습니다. 따뜻하고 편안한 행복도 잠시, 아이들이 성장하자 화장실 하나론 불편하여 아내와 상의 끝에 또 다시 10년 간 애써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아파트를 샀습니다. 화장실 하나는 침실에 딸려있어 출근 시간에 아이들과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진단 받았더니 암 말기로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화장실 세 개 바꾸다 간 사람.' 물론 극단적인 예지만 "아니오, 내 인생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 앞에 서야할 줄 모르기에, 언제든 주님 뵙기 부끄러움 없도록 최선 다해 봉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거룩한 분을 기다림이 신앙입니다. 모두가 땅만 바라보고 욕심에 사로잡혀있을 때 하늘을 바라보고 주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땅에 빛을 비춰주시고, 어두운 마음에 길을 보여주시고, 낮은 계곡이 높아지고, 높은 봉우리가 낮아지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아도니람 저드슨(Judson Adoniram)은 미국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미얀마에서 선교할 때, 정부의 박해, 열대성 열병, 투옥생활, 아내와 자녀들의 사망 등 갖은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저드슨이 미얀마에 발을 디딘 후, 6년이란 긴 세월 후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었고, 7년째였던 1820년에는 10명의 미얀마인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미얀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얀마 정부는 모든 외국인을 영국의 첩자로 생각하여, 저드슨은 1년 반 동안 족쇄에 묶여 어둡고 벌레와 병균이 들끓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영국군의 북상으로 인해 죄수로 북쪽으로 끌려가면서 말로 못 다할 고초를 겪었습니다. 저드슨이 풀려나고 얼마지 않아 아내 낸시는 몸이 병약하여 별세하였고, 몇 달 후엔 저드슨이 동네를 다니며 동냥젖을 얻어 먹인 어린 딸도 열병으로 미얀마 정착 초기에 죽은 첫째 아기와 아내의 뒤를 따라 숨졌습니다.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으로 저드슨은 2년 이상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홀로 지내며,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을 발견할 수 없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저드슨은 숱한 고생으로 아내를 잃고 재혼, 3혼 했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모두 병으로 사별했으며, 13명의 자녀 중 2명은 출산 중 사산했고, 5명은 열병으로 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다시 믿음을 회복합니다.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보내려고 배에 태울 때, 저드슨은 앞으로 2년 동안 아내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알고,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부부가 이 지상의 어느 조용한 곳에 가서 나머지의 여생을 평화롭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인생은 짧다. 지금도 수백만의 버마 사람들이 멸망해가고 있다. 아마도 나는 버마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로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해줄 수 있는 지구상의 단 한 사람일 것이다." 저드슨은 주님께 순종하려고 자신의 모든 안락과 행복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자, 저드슨은 말합니다. "낙심하다니요? 우리 주님의 약속이 태양처럼 빛나는데요." 져드슨은 1840년 10월 미얀마어로 성경번역을 시작한지 23년 만에 신구약 모두 마쳤습니다. 저드슨이 죽은 후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도 없던 미얀마에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는데, 그가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에도 끝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오심에 대한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암담한 현실과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의롭고 경건한 생활로 주의 오심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 전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과 교제에 힘쓰며 경건히 살아갈 때, 주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3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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