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131회
"아버지 계시는 집으로"
2020년 10월 4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15장 11 - 24 ; 시편 84 : 4
여러분, 이번 5일간의 추석 연휴 동안 고향집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젠 고향집에 부모님이 안 계셔서, 혹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방역당국의 고향방문 자제 권고에 따라 이번엔 안 가셨다구요? 그래도 모두들 다녀오신 줄 압니다. 지난주간 국민일보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장은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아무리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도 우리는 이번 추석에도 고향에 간다. 몸으로 가지 못하면 마음으로라도 간다. 왜 우리는 기를 쓰고 고향에 가는 것일까. 거기가 그리움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그리움이야말로 낯선 곳을 방랑하는 자신을 살아 숨쉬도록 만드는 궁극의 실재'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그리움을 간직하며,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설사 몸으로는 고향집에 못 갔어도 마음만은 모두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국민의 태반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수천 년 농경사회에서 자기 땅을 지키며 살아오다가, 6.25 전쟁통에 피난살이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60, 70년대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너도나도 정든 땅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많은 사람들이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식이 가정불화나, 혹은 농촌생활이 싫어서 부모 몰래 야반도주하여 가출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명절이 되면 부모님 내의 나, 소고기 두어 근 사들고, 열 시간 넘는 귀향 길에도 고향집을 찾았었습니다.
노은주, 임형남의 [집을 위한 인문학]은 '좋은 집'에 대해 말합니다. "집이란 원래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낮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피곤했어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가족들이 있는 그런 의미 있는 곳인데, 우리는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된다. 추억이 있고 기억이 묻어 있는 집, 내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가족이 함께 머무는 집, 그런 집이 정말 좋은 집이 아닐까." 방랑객과 여행객은 다른데, 방랑객은 세상을 떠돌면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이고, 여행객은 곳곳을 떠돌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랍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인데, '삶이란 좋은 집을 만들기 위해 떠나는 순례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집'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가족이 있는 가정(막3:20)이고, 둘째는 교회, 혹은 성전(딤후2:20)이며, 셋째는 하나님 아버지 계신 천국, 혹은 천당(요14:2)입니다. 신앙인은 이 집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시대 위기는 이 집에 대한 그리움이 실종돼버린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오랫동안 성도들의 그리움의 대상이었는데, 요즘은 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움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초월하는 개념인데, 요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부덕으로 인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성전에 대한 그리움마저 증발돼버린 것 같아, 참으로 슬픕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의 가출은 단순히 어떤 가정에서 일어난 한 아들의 가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영적인 가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아버지 집을 떠났는데, 그러면 그가 추구했던 행복의 요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둘째 아들은 물질을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하여 아직 살아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하고 유산을 요구합니다. 유산을 주고 주지 않는 것은 아버지 권한으로,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자식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 아들은 많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리라 생각하여, 아버지께 재산을 내놓으라고 무례히 요구했습니다.
이런 자식에게 유산주지 않으면 그가 집을 나가지 못했을 텐데, 아버지는 의외로 이 아들에게 유산을 내어주십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유산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을 훤히 아셨을 텐데, 재산을 내준 것은 이미 아버지에게 마음이 떠나 버린 자식을 보며, 재산은 없애더라도 제발 자식이 돼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주지 않으면 집을 못나가겠지만, 아버지보다 돈을 더 크게 생각하는 아들을 보며, 차라리 돈은 잃더라도 자식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 유산을 내어준 것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알뜰히 재산 모아 큰 빌딩을 소유한 권사님에게, 외아들이 사업한다고 돈을 달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안 된다해도 빌딩 있는 것을 알고 막무가내라서 어쩔 수 없이 사업자금을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되어 끝내 빌딩까지 팔아먹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사업 안될 것 모르셨습니까?" "알았지요." "그런데 왜 돈을 주시고, 끝내 빌딩까지 팔아주셨습니까?" "줘야지요. 안 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보면 그 자식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은 나를 빌딩주인으로, 돈 많은 과부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딩 다 팔아치우고 나니, 이제 그 자식이 아들 되어 돌아왔습니다. 나는 재산 잃고 아들 얻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둘째, 아들이 생각한 또 하나의 행복의 조건은 자유였습니다.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고 하여, 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받자, 곧바로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버립니다. 이제는 아버지 간섭이나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살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집트나, 에티오피아로 보이는데, 돼지 치는 곳인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밖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자유하고, 기차는 철로 위에서 자유하듯, 하늘을 나는 연이 줄에 메이기 싫어 그 줄을 끊어 버리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19세기 계몽주의는 '신은 죽었다'며 전통의 종교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결과는 세계 1차, 2차 대전의 집단살육이었습니다. 신을 떠난 인간은 선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셋째, 그가 추구한 또 하나의 행복은 쾌락이었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13절b)고 했는데, 그가 아버지 유산을 받자 먼 나라에 가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을 보면, 그가 전부터 꿈꾸고 소원했던 것이 바로 쾌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욕망의 불길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히11:25)고 하여, 쾌락에도 '낙'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잠시' 뿐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에밀 졸라의 [나나]라는 소설에 '나나'는 바리에떼 극장의 여배우로 활약하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스스로 창녀가 됩니다. 아름다운 창녀 주위엔 수많은 남자들이 몰려들어 쾌락을 좇다가 비참하게 몰락합니다. 끝내 나나도 왕궁처럼 화려한 거실에서 천연두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비너스는 썩고 있었다. 마치 시궁창이나 길거리에 내버려진 상한 고깃덩이처럼 썩고 있었다.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해친 독소가 마침내 스스로의 얼굴을 천연두로 썩게 하고 있었다." 나나의 최후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쾌락은 철저하게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에게 찾아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토록 재물을 추구했던 그에게 궁핍이 찾아왔습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15:14).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으나 곧바로 모두 탕진하고, 그곳에 크게 흉년이 들자 호구지책으로 돼지 치는 일을 거들지만, 입에 풀칠도 못해 사료인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오는 필연적인 현상은 흉년입니다.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낙원을 떠난 인간은 기근을 만나 처절하게 굶주리고 맙니다.
둘째, 아버지 곁을 떠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려 했던 탕자는 이방인의 종살이를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15:15).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겨 사육하거나 먹지 않기에 그가 간 곳은 이방 땅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이 싫어 찾아간 곳이 흉년이 들어 이방인의 일꾼이 됨으로, 유대인의 가장 큰 수치인 이방인의 종이 된 것입니다. 자유를 찾아 아버지를 떠났지만, 가장 부자유한 이방인의 종이 됩니다. 자유를 위해 신을 떠난 인간은, 방종으로 스스로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셋째, 쾌락을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에겐 쾌락 대신, 죽음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6-17). 그는 쾌락만이 진정한 행복을 줄 것으로 여겨 아버지 집을 떠나 이방 땅에 가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그 짜릿한 전율과 말초적인 쾌락은 잠시 뿐이었고, 이내 재산은 모두 탕진하고, 흉년으로 인해 식생활마저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찰나의 흥분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리에서, 이젠 생존을 위한 기본욕구마저 채울 수 없습니다. 분홍빛 허영과 사치가 사라진 곳에서, 그는 돼지우리에서 돼지 사료조차 맘껏 먹을 수 없는 극도의 치욕과 궁핍에 시달립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하나님 없는 자유와 쾌락만으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을 알고 그 품에 돌아올 때만 행복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 하나님을 떠나 기근과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시는 그 애타는 호소가, 먼 땅에서 짐승처럼 살던 탕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아들이 집나간 뒤,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이 날마다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 마음이 아들을 돌이키게 합니다. 탕자는 자기 처지를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 죽게되지 비로소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굶어죽을 지경에 차마 아버지 자식이라 할 염치도 없어,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며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변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그를 받아주며 송아지 잡아 잔치 열어주십니다.
이 탕자가 돌아 온 아버지 집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과 양식이 있는 곳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집나간 이 탕자는 돼지사료로도 배불리지 못했는데, 아버지 집은 '품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식이 풍족한 곳'입니다. 돌아오는 아들 먼저 본 아버지는 달려가 끌어안고 입맞추며, 송아지 잡아 잔치합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이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우리는 바로 아버지 집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급 승용차도 기름 떨어지면 쓸모가 없듯, 우리의 영혼도 매주일 하나님 집에서 생명의 양식 공급받지 못하면, 허기지고 굶주리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굶주릴 때 그 영적 영양실조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품꾼에게도 배불리 먹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이 있습니다.
댄 알렌더의 [안식]이란 글입니다. - 에티오피아에서 우리 부부는 어느 주일에 원데 목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향로에 푹 절인 양고기를 요리했고, 집안은 말끔하게 청소가 된 상태였으며, 마치 왕이라도 대접하듯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가 막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원데 가족이 환호하던 모습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원데 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풍성한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족히 한달 식비는 투자한 것 같았다... 주일날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접하면서 바로 저런 사랑의 언어를 들려주시는 날이 아닐까? 그렇다. 주일은 성삼위 하나님이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아보라고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날이다.
둘째, 아버지의 용서와 회복이 있는 곳입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1-22). 아들은 차마 '자식이 돌아왔다'는 말은 못하고,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 봐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아버지는 그 말엔 대꾸도 하지 않으시면서,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또 발에 신을 신겨주십니다.
옛날 중동에선 훈장이 없고, 공로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땐 왕이 귀한 옷을 하사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 것은,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아들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선포하는 뜻입니다. 가락지는 권위를 뜻하는 인장반지로, 탕자에게 반지 끼워준 것은, 자기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노예는 신발을 신지 못했는데, 먼 나라에서 머슴살이하다 품꾼의 신분으로나마 집에 돌아오겠다는 아들을, 신발 신겨줌으로 당당한 자유인으로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어느 TV드라마에서 싫다는 남자를 쫓아다니는 여동생에게 오빠가 '너는 자존심도 없니?'라고 말하자 여동생은 눈물 글썽이며 대답합니다. '오빠, 사랑해봐. 자존심이 보이지 않아.'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의 극치는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 안아 주는 모습입니다. 유대인은 발목이나 발바닥 드러내는 것은 주변 사람을 모욕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달려간다'라는 표현이 없는데, 아버지가 달려간 것은 아들을 위해서는 체면은 물론 남의 손가락질도 감수하겠다는 절대적인 사랑이 나타나있습니다.
셋째, 아버지 집엔 참된 기쁨의 잔치와 교제가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3-24). 탕자는 차마 뵐 낯이 없어 자식이라고 못하고, 품꾼으로나 맞아주시길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송아지 잡아 잔치 열어주십니다. 이 '살진 송아지'는, 유대인들이 귀한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는 송아지인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잔치하려고 미리 준비해놓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하르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한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21:13)이라며,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집이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에서, 철없는 7살 개구쟁이 악동 소년 상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외할머니에게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 끝 부분에서 마침내 이 소년은 할머니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할머니는 말을 못하니까 전화도 할 수 없고, 글씨를 읽을 줄 모르니까 편지도 할 수 없는데, 할머니가 아프면 어떻게 해? 할머니, 아프면 그냥 아무 것도 안 써도 좋으니까, 그냥 쓰지 말고 편지해. 그러면 내가 할머니한테 뛰어올 테니까. 알았어? 보고싶다. 할머니, 할머니" 상우는 할머니 집을 떠나며 할머니가 자기 영혼의 집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 집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먼저,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알고 언제나 아버지 집을 가까이해야 하겠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의 그 소중함을 몰라 집을 떠났다 죽을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또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면, 어쩌면 영영 버려졌을지도 모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12세 된 예수님을 잃었다 성전에서 발견하고,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고 책망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있음이 마땅한 일로 여기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가출하여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와 잔치하자 집에 들어오지 않고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다"(눅15:29)고 불평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고 달랩니다. 큰아들은 몸은 비록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 집에 기여하는 아들이 되어야합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대소변 가리지 못하고, 그저 방싯방싯 웃는 모습만으로도 부모에게 큰 효도합니다. 그러다 자라며 학교 다니고 제 할 일 하나하나 배워가다가, 성년이 되면 부모님께 선물도 해드리고 부모님 모실 줄도 알게됩니다. 다 큰자식이 언제까지나 부모님께 짐이 되고, 걱정거리 되면 불효자식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을 자로서, 오늘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위하여 수고와 고난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나오는 글입니다. - 얼마 전 열 다섯 살 난 딸과 전쟁중인 목사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딸이 피임약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부모가 갖가지 벌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딸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으며 역습할 방도를 찾곤 했다. "이게 다 엄한 것밖에 모르는 엄마 아빠 잘못이에요!" 친구가 말했다. "거실 두터운 유리창 앞에 서서 어둠 속을 내다보며 그 애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일이 생각나네. 속에서 분이 치밀어 올랐지. 나도 탕자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만, 우리를 기롱하고 상처마저 입힌 딸아이한테 역정이 나더군. 물론 제일 큰 상처를 받은 건 자기 자신이었겠지.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된 선지서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 그분께 상처 주기에 능한 백성 앞에서 그분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으셨던 걸세." "진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네. 그 날 밤, 아니 이튿날 새벽 딸애가 집에 오자 그야말로 천하에 아무 것도 바랄 게 없었다네. 다만 그 애를 두 팔로 감싸안고, 사랑해 주고,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고 싶었을 뿐, 나는 사랑에 애타는 무력한 아버지였다네." 하나님을 생각하면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모습으로, 한때 생각했던 엄격한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 내 친구가 고통스럽게 어둠 속을 응시하며 두터운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자식의 부당한 대우 때문에 상처받고서도 오직 용서와 새출발을 원하여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기쁘게 외치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은혜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개인적인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상의 문제들이 해결됐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아픔과 고난이 다 끝났기 때문도 아니고, 수많은 영혼이 이미 회심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 하나를 찾으신 것으로 기뻐하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헨리 나우웬의 [예수의 길]이란 기도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저와 함께 하여주소서. 제 산만한 심정을 들어주시고, 이 혼란스러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소서. 저는 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제게 그 길을 보여주소서. 주님은 고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소란한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주님은 평안이요 기쁨이시니 저도 평안하고 기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이는 주님과 가까이 살 때 맺는 열매이오니 사랑하는 주님, 저를 주님께 가까이 이끌어 주소서. 아멘."
'강아지도 자기 울안에선 사자(獅子)'라는 격언처럼, 아버지 계신 집처럼 편안한 곳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 거하며 그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