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7 64회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
욥기 2 : 1 - 10
2018년 10월 7일 주일예배 설교
매주 토요일, 주일 저녁을 텔레비전 앞에 묶어둔 드라마가 있었지요. 뜨거운 호평 속에서 “미스터 션샤인”이 끝났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많은 명 대사가 남겨져 회자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구상하고 시작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의병 사진’입니다. 1907년 영국 출신의 종군기자인 맥켄지가 찍은 사진으로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 실린 사진입니다. 작가는 이 사진을 모티브로 1900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 제국 시대 의병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 포스트 한 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義兵)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잘 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잊혀질뻔한 의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했다는 데서 큰 의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또 그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서로에게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지요.
사실 역사를 보면 그 당시 시대상은 작가가 구성한 들불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정치인들과 양반가문들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란 병자호란때처럼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 한 장의 사진인 ‘의병 사진’을 통해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울림을 주고 있는 듯 합니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 여러분은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 돈, 자녀, 명예 등 각자에게 기키고 싶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분명한 이유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들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라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도로 위의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허둥지둥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비를 피하기 위해 눈에 띄는 한 건물의 좁은 처마 밑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곳에 한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하자 할아버지 한 분이 가세합니다. 그 다음 중년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아주머니 한 분이 비좁은 틈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출근 시간대의 만원버스처럼 작은 처마 밑은 비를 피하는 낯선 사람들로 금세 꽉 들어찼습니다. 사람들은 비좁은 틈에 촘촘히 서서 빗줄기가 잦아들길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지만, 비는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덩치 하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쪽으로 뛰어오더니, 가련하기 짝이 없는 대열에 합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했던가요? 아주머니가 대열에 끼어들자 먼저 와 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튕겨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처마 밑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모두 딴 곳을 바라보며 모른 척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께서 그 청년에게 한 마디를 건넵니다. 마치 세상의 지혜인 것처럼 말이지요. “젊은이,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라네”
이 말에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바라보더니 길 저편으로 뛰어가 금방 모습을 감췄습니다. 4~5분 지났을까요? 길 저편으로 사라졌던 청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닐우산 다섯 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세상은 절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청년은 다시 길 저편으로 비를 맞으며 사라졌고,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청년이 쥐어준 우산을 쓰고 분주히 제 갈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마 밑에 한 사람은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청년에게 말을 건넨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우산을 바닥에 놓고는 장대비 속으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이 할아버지는 청년의 뜻밖의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삶의 지혜를 통달한 듯이 건넨 말에 청년의 ‘그렇지 않다’는 말 앞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며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합리화하며 살아온 무감각한 인생을 말이지요.
본문의 배경: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 =>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에 욥은 하나님께 붙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욥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욥의 이야기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 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욥이 당하는 모든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믿고 사탄에게 내어준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욥이 끼어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 속담 표현처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모양새입니다. 욥은 지금 자신에게 당한 상황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체 하나님의 외면과 사탄의 계략 가운데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합니다. 먼저, 사탄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유때문이라고 말하며, 그에게서 주신 소유물을 거두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기 1:10-11절입니다.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특별히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같이 보호하고 지켜 주셔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사탄은 욥의 육신이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건강이 있기에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5절에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탄이 바라보는 욥의 모습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을 잘 꿰뚫고 있지 않습니까? 재물과 가족과 건강입니다. 사실 이 세 단어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며 손실하지 않도록 지키려 합니다. 어떻게 하던지 재물을 조금 더 많이 모아 윤택한 삶을 영위하려고 애씁니다. 자산을 불릴 수 있는 있는 기회가 생기면 편법을 사용해서라도 눈 한번 감고 이익이 되는 것에 손을 댑니다.
가족은 어떠합니까? 요즘 선생님들이 학생들 가르치기 무섭다고 합니다. 한가정 한 아이가 대세인지라 부모들의 간섭과 심지어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더 돋보이도록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일이 발생하면 전후사정 따지지 않고 아이편에서 선생님과 학교를 비판하며 교육청에 고소하느니, 인권 침해니 하며 난리를 편다고 합니다. 그 스트레스로 선생님들이 정년이 되기 전에 교직을 떠나거나 수술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내 자식, 내 가족 중심주의로 가족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행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건강은 어떠합니까?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100세 인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유엔이 2009년 '세계인구 고령화'라는 보고서에서 사용한 용어인데, 의료기술의 발달과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류가 100세 장수(長壽)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확인하는 용어입니다. 이제는 100세 시대에 맞추어 우리의 건강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신의 소유, 자신의 가족, 자신의 건강, 이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욥이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욥에게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실 때 욥은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사탄은 욥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 신앙의 모습으로 견지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행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부어 준 세상의 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다고 사탄은 확신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 붙어 있음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자신의 잘됨과 후손의 잘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세상에서 자랑과 부귀영화를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사울왕
우리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를 묵과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그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지기키 위해 하나님께 시선을 두지 않고, 백성들에게 시선을 두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블레셋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전장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약속한 날에 사무엘 선지자가 더디 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합니다. 마음이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에 사울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고자 부득히 번제를 드렸다(12절)고 합니다. 나아가 사무엘상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치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역시나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그 모든일을 준행하며 당당해 하였습니다(21절).
사울왕에게 중요한 것은 백성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분이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를 교묘히 이용하였습니다. 사울왕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왕의 자리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 사울왕은 하나님이 아닌 백성의 마음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지킬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잠언 4:23절에 말씀하십니다.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으로 포석을 놓고 있는지 우리는 자문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욥의 반전
분명히 사탄은 확신했습니다. 지금 욥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욥의 반응을 주목합니다. 지금 욥의 가족과 욥의 재산을 일순간 거둔 후에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욥기 1:21-22절입니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나아가 온 몸에 종기가 나 힘들어 하는 욥을 향해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어리석은 여자라고 말하며 자신의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기 2:10절입니다.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몸도 성하지 않게 외면하신 하나님께 욥은 책임을 물지도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죄의 길을 걷지 안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무엇이 궁지에 몰릴대로 몰린 욥이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게 한 것일까요? 무엇이 욥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칭찬하는 욥의 성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전해진 욥의 성품에 대해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욥기를 시작하면서 무려 3번에 걸쳐 욥의 성품에 대한 기사를 읽습니다. 욥기 1:1절과 8절, 그리고 욥기 2:3절입니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은 욥의 성품에 대해 ① 온전하며. ② 정직하며 ③ 하나님을 경외하며 ④ 악에서 떠난 자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욥의 인격과 신실한 신앙의 모습을 말합니다. 온전함은 도덕적인 온전함을 뜻하는 것으로 도덕적 자질이 훌륭함을 강조합니다. 정직함은 인품의 강직함을 표현한 말로 욥이 삶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의 묘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욥의 성품을 강조합니다. 인격적으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경건한 삶의 모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의 표준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성숙한 인격과 정의편에 선 곧은 사람의 이미지입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흠없는 자의 대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길 법 합니다. 욥이 완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자랑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욥이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는 신앙의 자세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품을 지녔기에 하나님도 욥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뉘앙스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욥을 치고 싶은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사탄이 너무 말이 많아서 한번 해 보던지 하고 툭 던진 것입니다. 체념이 아닙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을 믿었기에 그러던지 말던지 욥은 믿음으로 살아낼 것을 믿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본문 3절과 9절에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점함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고 욥을 인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신앙의 완벽함입니까? 그의 인격의 고귀함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고 지키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자 믿음의 몸부림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0절입니다. [10. 그가 이르되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나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것, 자신이 누렸던 것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은 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화도 역시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무엇이라 원망하거나 욕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닥친 상황이 어떠하던지 그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굳게 서도록 믿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닥친 삶이 어떠하던지 믿음으로 살아 내는 것! 바로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성품입니다.
신앙의 온전함을 붙들며 믿음으로 살아내는 이야기는 단순히 신앙 위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불러야 할 찬양이기도 합니다. 시편 26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완전한 삶을 살고자 했던 자신을 무고하게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26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 다윗의 완전한 삶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 다윗은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완전하게 행함’은 자신이 전혀 흠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함을 이야기합니다. 어찌 인간이 완전하고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도 연약하고 실수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바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루어져 가는 완전함을 위해 믿음을 살아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임금 노릇을 하면서 부패 행위를 저질렀다고, 악한 무리와 손을 잡았으며, 뇌물을 받았다는 억울한 고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판단할 분 하나님께만 올인(All-in)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11-12절에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고 외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신실함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함을 외치며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무리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놓치지 않으며 믿음의 살아내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며 믿음으로 살아 가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붙잡으며 살아가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욥처럼, 다윗처럼 완벽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살아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유정옥 사모님이 쓰신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사모님에게는 자식이 넷 있다고 합니다. 아들 둘은 낳은 아들이고, 나머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두명의 자녀는 입양아닌 입양으로 키운 자식이었습니다. 그중에 입양한 아들이 군대에 간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군대에 위문을 가서 입양한 아들을 만났는데, 아들이 심각하게 말을 합니다. 한달 먼저 들어온 선임이 매일 자신에게 연병장을 뛰고 와서 보고한 뒤 밥을 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들에게는 천식이 있어서 아침 일찍 뛰는 것이 고통스럽고 다 뛰고 가면 식사 시간이 다 끝나 밥을 못 먹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구타가혹행위를 들은 것입니다. 아들을 말을 들은 사모임은 심장이 딱 멎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선임이 아무래도 자기가 졸병일 때 비해 네가 편해 보여서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연병장을 더 잘 돌아라. 괴오워하며 억지로 돌지 말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돌아라. 다 돌거든 선임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많은 사람들에 너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고마운 것 아니냐.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잖니?”
사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어미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이후 아들이 연병장을 돌 그 시간에 사모님도 함께 운동장을 뛰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며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한달이 다 되어 갈 즈음 아들에게 편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 저는 오늘에서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고 그 날로 단번에 끝장을 낼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 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구보 때는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다 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선임을 통하여 저의 지병인 천식을 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선임이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저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소리쳐 보내 드립니다. 어머니! 제 목소리 들리면 기뻐해 주십시오.”
구타 가혹행위와 무고한 압박에도 유정옥 사모님과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잡으며 온전히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믿음의 관계를 세우는 온전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이유
믿음으로 살아내는 욥의 모습을 주목하여 보신 하나님! 과연 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면 하나님 편에서 욥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완패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마지막 한방이 있다며, 욥의 육체를 치게 허락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한 가지는 금하십니다. 6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의 전략적 계략에 하나님도 허락합니다. 그런데 마지못해 사탄의 제안을 받아 주시지 않고 계십니다. 사탄이 오버(over)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건들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생명’은 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 1:27과 2:7절입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보다 더 많은 공을 들이셨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호흡을 하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성품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자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자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삶의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성품대로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욥을,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사탄에게 내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깨닫고, 경험한 히브리서 기자는 2:6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시편 8: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고백합니다. [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돌보아 주신다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존귀한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주목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를 주의하여 보십니다. 그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살아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억하시며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45:15-16절입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이 사탄의 시험에 내어줌을 당했어도 하나님은 그를 마지막까지 지키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자랑합니다. 욥이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믿음의 몸부림으로 붙잡고 있음을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도 그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을 내려 놓은 사람
지난 9월 16일 지구촌교회 예배 시간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져 한국교회에 큰 이슈를 낳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구촌교회 진재혁 목사님께서 주일 예배 설교 도중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의 자리를 내려놓고 케냐 선교사로 나가고자 한다는 발표때문입니다. 진목사님은 창세기 22장 1-12절을 본문으로 “축복의 삶! 믿음의 여정!(8) 드리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사임과 아프리카 선교사로서의 복귀를 언급했습니다.
진 목사는 “왜 목사님들이 크고 좋은 교회 가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며, 크고 좋은 교회 가는 것도 하나님 뜻이지만 작고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있다고 말하며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저는 지난 8년 동안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축복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원로 목사님의 멘토링과 기도와 사랑 동역자들과 성도님들의 사랑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아프리카 대륙 케냐 어둠과 저주의 땅으로 다시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가듯이 믿음의 길을 순종하여 가고자 합니다. 지금 가장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이지만 이 시간 떠나고자 합니다. 지구촌교회 어려웠던 승계의 과정 가운데 건강한 교회로서의 성숙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며 이후로도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처럼 다 드릴 수 있는 믿음 다 드려지는 순종이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며, 성도들에게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마 목사님은 후임이 결정되는 대로 케냐 선교사로 떠나신다고 합니다. 소위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내려 오는 것! 아마 큰 결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결단은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온전히 굳게 지켜나가는 목사님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그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앞에 온전히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욥처럼, 다윗처럼 믿음으로 온전히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켜 주십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며 이 한주간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