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108회
“어리석고 고약한 죄”
2021년 1월 31일 주일예배
시편 14 : 1 - 7 ; 로마서 1 : 18 - 20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과학과 신학은 엄밀히 말해 별개의 영역이라며 “신학은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고,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으로서 ‘서로 질문이 다르므로 과학과 신학은 독립적 학문’이라면서, 신학의 관심이 창조의 목적에 있다면, 과학의 관심은 창조의 과정을 밝히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창조주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어떤 죄인지 밝혀줍니다.
첫째, 무신론은 어리석은 죄악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시14:1). 창조주가 없다는 주장보다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만물을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꽃이나 경치를 보며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찬양하는데, 이런 자연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둘째, 무신론은 악하고 더러운 죄악입니다. 다시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시편 기자가 ‘사람은 다 죄인이다’는 이 얘기를 하는 것은, 무신론자는 지적인 오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부모 없이 태어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기를 존재케 한 부모를 부정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무신론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도덕적으로 악한 죄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윤리와 도덕의 논리의 근거가 빈약한 것입니다. 사람이 절대가치인 하나님을 부정할 때, 이제 남는 것은 상대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밖에 남지 않기에, 윤리가 세워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도덕이 말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무신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시14:5). 왜 두려워합니까? 근본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계시니까 두려운데, 그때 회개하면 되는데, 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무신론 속으로 도피해 버립니다. 그리고 무신론은 무책임한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때 아담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움이 그가 숨게 된 동기라고 말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이 도리어 심판이 두려워 애써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이런 무신론의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낮에는 별들을 볼 수 없듯이, 우리의 지성은 완전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서, 인간은 한계 안에서만 보고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의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라며, 우리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주시길 기도해야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부여받은 지성은 그 지성이 어떤 실존에 맞닥뜨릴 때,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여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께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알고 구원 얻도록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오직 주님의 은총에 근거합니다. 도킨스와 맥그래스는 함께 옥스퍼드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한 무신론자였는데 그 후, 한 사람은 무신론의 대표주자가 됐고, 다른 사람은 복음주의 최고의 지성이 되었습니다. 처음 같은 길을 갔으나 이렇게 정반대가 된 것은, 맥그래스에겐 도킨스에게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오직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경계해야할 것은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본문의 ‘어리석은 자’를 ‘실제적인 무신론자’라고 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나는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 소리도 잘 하고, 찬양이나, 기도도 제법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나, 중요한 결정할 때는 하나님 없이 결정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업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처세하는 사람은 실제론 무신론자입니다.
신앙은 사후 세계뿐만 아니라 생전에 이미 보상해줍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평균 7년 더 장수한다는 100여 편의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