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 70회
"이렇게 세상에서 살라!"
2019년 10월 20일 주일예배
창세기 14 : 13 - 24 ; 마태복음 5 : 13 - 16
에미상을 받은 최초의 대주교인 풀턴 쉰 대주교가 어느 날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처음이라서 쉰 주교는 주변을 구경하려고 호텔에서 나왔는데, 그만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세상 물정에 밝은' 아이들에게 시청으로 가는 길을 묻자, 한 소년이 무얼 하러 가는지 묻기에 "강연하러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천국에 가는 길에 대해 강연할거다. 너희들도 오겠니?" 그러자 소년이 말합니다. "지금 농담하세요? 시청에 가는 길도 모르시면서." 우리는 천국 가는 길뿐만 아니라, 세상의 길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무능할 권리가 없기에 자기발전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종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우 유능하여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진 학생과,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 만들려고 모든 일에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다고 합니다. 후자는 목회를 해도 실패할 것이고, 전자는 너무 교만하여 적합하지 않다며, 전자는 좀 아깝더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는 윌리암 클라크(William S. Clark) 박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 학장이었던 그는 1876년 삿포로 농업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8개월 남짓 일본에 있었으나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여, 일본의 간디로 불리는 '우찌무라 간조'나, 도쿄여자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 같은 걸출한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일본이 1868년 명치유신에 성공하고서 신일본을 건설하겠다며 당시 선진국가였던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선진문명을 도입하면서, 미국의 농업학자로 윌리엄 클라크 박사를 초청했는데, 그가 요코하마 항에서 마중 나온 장학관이 그의 짐에 많은 성경책을 보고 '성경책은 학교로 가져갈 수 없다'고 하자, '그러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겨우 '수업시간에는 성경을 가르치지 말고 방과후에나 가르치라'고 하여, 삿포로 농업학교 교장에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임 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전교생이 크리스천이 되어 세례 받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학생들과 침식을 함께 하며 동고동락하는 그의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자세에 학생들은 감명 받아 그의 기독교신앙을 모두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탓으로 8개월만에 그는 일본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떠나는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행한 고별연설이 그 유명한 "소년들이여, 큰 뜻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는 명언입니다. 우리는 어떤 뜻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럭저럭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거룩한 뜻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땅이었지만, 그러나 그곳은 아직도 가나안 족속들이 버티고 있어, 때로 그에게 위협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과 섞여 함께 협력하며 함께 생활해야했던 이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어떻게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기 역할과 본분을 다하며 살았는지 그 신앙의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국가간 연합전쟁으로 주전 약 2천년 전,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 등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네 나라가, 팔레스타인 남방 사해지역 '소돔, 고모라, 아드마, 수보임, 벨라' 다섯 나라에 쳐들어와 싯딤 골짜기에서 격파하고 그들의 모든 재산과 포로들을 잡아간 이야기입니다. 그때,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그의 모든 재산과 함께 자기와 가족들까지도 잡혀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가병 318명과, 동맹관계에 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군사들과 함께 북방 동맹군들을 추격하여 야습을 감행하여, 그들을 쳐서 파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직 떠돌이 신세로서, 강력한 이방 부족 틈에 끼어 살고 있었기에, 그들 가운데서 소수자로서 살아남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에도 아브라함은 다수의 불신자들인 가나안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도,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신과 자기 부족을 지키며, 끝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불신 세계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성공할 수 있었던 그 지혜를 우리는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스스로 힘을 길러야합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 십 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창14:14).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동맹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자, 그를 구출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겐 무려 318명이나 되는 가병이 있었습니다. 여기 집에서 '길리고'라는 히브리어 '얄랏'은 '낳다, 태어나다'는 뜻으로, 돈주고 사온 자가 아니라 집에서 태어난 자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들 군대를 금방 돈주고 사온 용병들이 아니라, 전부터 데리고 살던 가정에 소속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훈련된 자'라는 말은 '연습시킨 자, 무장시킨 자'라는 말로, 공공의 치안과 질서가 갖춰지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스스로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평소 군대를 훈련시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12:3)라는 약속을 받고서도,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양성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약속을 믿지 못한 불신앙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도와주신다는 약속을 믿었지만, 자기가 해야 일은 스스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자신과 가족이 이방인들에게 피해 당하지 않도록 힘을 갖춰야한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앙으로 매도해선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하지만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자기 양식을 위해 스스로 일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힘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동등하지만, 힘있는 자가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군대에서 이등병과 사단장의 그 생명의 가치는 동등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영향력은 크게 달라집니다. 이등병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자기 믿음 하나 지키는 것으로 족할 수 있지만, 사단장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 헌신하면 그는 그 사단 전체에 복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면서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해야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만 잘하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신다'는 말은 절반은 믿음이고 절반은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을 대단한 믿음으로 여기는데, 이런 것은 미신입니다. 인간의 의술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고쳐주기도 하시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은 병원과 의사와 약품을 사용하십니다. 사십 일을 굶고도 생명을 유지하게 하기도 하시지만, 보편적으로는 밥을 먹어야 힘을 얻어 일하게 하십니다.
힘을 키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께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했던 아들을 제물로 바쳤던 그 믿음 좋은 아브라함도 자기 집에 3백 명이 넘는 가병을 양성하여 힘을 지녔기에 주변에서 그를 도와 함께 싸우는 자가 있었지, 그만한 힘도 없었더라면 누가 그를 위해 싸워주겠습니까? 불신자가 많은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저들의 공격과 박해를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길러야만 합니다. 잠언서는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24:5). 우리가 불신자들 틈에서 저들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바른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힘을 키워야만 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원하는 것은, 단지 좋은 대학교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라는 게 아니라, 저들이 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기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크게 쓰신 이유를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모세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이었던 애굽의 학술을 배워, 그 말과 행사에 능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큰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길 원한다면, 우리 스스로 힘을 갖춰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는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이웃과 상호협력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웃에는 두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먼저는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이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공동운명체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동맹군에 의해 포로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브라함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출하려고 나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롯과 살던 지역이 두 집안이 지내기엔 좁아 갈라설 때, 롯은 아브라함에게 "삼촌이 먼저 좋은 곳을 택하면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양보하지 않고, 예의도 없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진 것을 알고는, 먼저 그곳을 선택하여 가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롯에 대하여 한편 섭섭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롯이 전쟁 중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놈 예의도 모르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더니 쌤통이다'며,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동맹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그를 구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좋고 싫고'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도, 그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본래적인 관계성'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는 한편이 되어 서로 돕고 협력하여 한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시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갖은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분열 때문입니다. 천만을 헤아리는 한국교회가 하나로 굳게 뭉친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감히 교회를 모욕하거나 농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나 천주교가 깨끗하고 투명해서 저들이 언론이나 정부로부터 우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조계종이란 대 종단을 중심으로 뭉쳐있고, 천주교는 하나의 단일체제로 돼 있기에, 힘에 약한 언론과 정부는 그들의 비리에 대해선 묵인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교단 분열과, 개교회 중심이라서, 어떤 비리만 나오면 교회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과 권력의 비겁함이면서, 우리의 하나되지 못한 탓에 숫자는 많으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만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화목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나뭇단을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 이 나뭇단을 묶은 그대로 꺾어봐라." 아들들은 나뭇단을 꺾어 보려고 했지만 꺾지 못했습니다. 다음엔 나뭇가지를 하나씩 주며 "이번엔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 봐라"고 하자, 아들들은 쉽게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서로 화목하면 나뭇단처럼 힘이 있게 되고, 서로 싸우면 모두 다 망하고 만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었지만, 롯이 이방인들에게 포로가 되자,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출함으로 둘 다 살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은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창14:13). 아브라함은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 등, 아모리 족속과 평소 동맹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민이지만, 이방인들 틈에서 소수민족으로 외롭게 생존경쟁 해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양을 치고 농사지으며, 그들과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고, 신세지기도 하고 갚기도 하며 서로 기댈 언덕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역의 일원으로 자기가 담당할 것을 감당하며, 불신자들이지만 그들이 어려울 땐 도왔고, 자신이 어려움 당할 땐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도 하는 교분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맹관계를 맺느냐?'고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후6:14)는 말씀대로,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 일도 함께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씀은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그들과 아무런 교제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한 영향력은 경계해야 하지만,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려면,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맥가브란 박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가깝지 않거나, 사람들과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사람들과 가깝지 않으면, 그들을 주님께 인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보다 실제적인 말씀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5:9-11). 믿음이 다르다고 아무 교류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 불신자들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도들끼리만 교회 안에서 지내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해야할 일을 생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도 감당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묻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의무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 다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천국과 동시에 훌륭한 세상 시민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셋째,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에 메소포타미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조카 롯과 소돔 지역의 포로된 자들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 먼저 아브라함을 영접한 사람은 소돔 왕이었습니다(17절). 뒤를 이어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맞이합니다(18-20절). 분명 소돔왕이 먼저 왔지만, 아브라함은 뒤에 온 멜기세덱을 먼저 만난 다음에 소돔왕을 만납니다(21절).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먼저 찾아왔지만, 제사장 멜기세덱이 그 뒤에 오는 모습을 보고는, 소돔 왕을 뒤로 미루고 먼저 하나님의 제사장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우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자칫하면 이방인들과 동화되기 쉬운 여건이었음에도,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기 위치를 잃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었던 것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홀했다면, 그는 이방 문화에 동화되어 이방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정체를 지며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성실해야 합니다. 정기적인 예배를 거르거나 소홀히 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에 실패하면 그의 인생에서 실패할 위험이 높습니다. 1960년대 호켄다이크 같은 신학자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내세우며, '이제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미국 교회는 그 주장에 귀기울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이는 일보다 세상 속에 흩어지는 일에 힘썼는데, 그 다음에 나타난 결과는 사람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세상으로 흩어지려해도 흩어질 교인들마저 사라져버렸습니다. 성도는 교회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서도, 모여서 예배드리는 일을 잘 해야만 성도로서의 자기 정체를 잃지 않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세상을 섬기는 성도로 훈련되어 곳곳으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생활만 하면 사탄은 어쩌면 교회를 포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생활만 하면, 사탄은 우리로 교회에만 정신 팔게 하고 세상은 포기하게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며 스스로 힘을 키울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끼리 하나되어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온 세상에 파급되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진짜 믿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주변 사람들도 변화되고 세상도 바뀌게 됩니다.
엄상익 변호사가 전한 실화입니다. 서울 변두리 허름한 지하에 교회를 개척한 박민철 전도사님은 50대 늦깎이 신학생으로 늦게 시작한 만큼, 열심히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녔으나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한 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교회를 개방하고 청소년, 어린이 전도로 방향을 돌리자, 금새 교회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 중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성추행했다는 신고 받았다고 끌고 갔습니다. 너무 황당했으나 어쨌든 하나님께 성실하지 못하고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하고 '내 탓이오'했던 한 마디가 범죄를 시인한 것으로 오인되어 구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 목회는 끝났습니다. 성추행범이 무슨 낯으로 목회합니까?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왜 저를 이렇게 처절하게 파멸시키십니까?" 감옥 '강도방'에 수감된 그는 갑자기 닥친 이 어이없는 현실을 곰곰이 생각했더니, 문득 며칠 전에 부지중에 하나님께 불평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도 문열어주는 사람이 없자 순간 화가 나서 '차라리 감옥에 가서 전도하는 게 낫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 비싼 전도지 가지고 열리지도 않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기보다, 이 소외되고 불쌍한 죄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그 후 전도사님은 누명이 벗겨져 감옥에서 나왔지만, 진짜 전도해야할 곳이 어딘지 깨닫고, 그 후 교도소전도를 시작하면서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추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힘을 키우고, 믿는 이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중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의 정체를 지키면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