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7 55회
"이런 자세로 봉사하십시오"
2019년 1월 27일 주일예배
사도행전 20 : 17 - 24 ; 시편 101 : 6
길거리에서 보면 자동차 뒤 유리에 재미있는 글을 써 붙이고 다니는 차들을 보게 됩니다. 그 글들을 보면 '애인한테 차여서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애 낳으러 병원 가는 중예요!'라는 글이 있고, '초보를 보호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3장 27절'라며 성경을 패러디한 글도 있습니다. 또 '♡초보를 사랑해주세요!♡', '당황하면 후진해요'라든가, 경차에다는 '커서 에쿠스가 될 거예요'라고도 썼고, '미치겄쥬? 지는 환장하겄슈!', '지금은 초보, 마음은 터보, 건들면 람보!', '어제 면허 땄어요', '밥해놓고 도로 연수중입니다' '3시간째 직진 중'이라는 글이 있고, 공항으로 신혼여행 떠나는 차에는 '초보결혼'이라는 글을 써 붙여 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정신과의사 이시형 박사의 [미국 자동차 뒷면 문구]라는 칼럼입니다.- 미국 대형 트럭 뒷면에 자랑스레 쓴 문구다. "이 차는 지난해 2만 7천불의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니 좀 불편하더라도 잘 봐달라는 뜻이다. 미국의 유통은 세계 제일이다. 값싼 물건을 생산지에서 소비시장으로 빨리 옮겨야 하는게 유통이다. 이점에서 미국은 단연 세계적이다. 잘 발달된 하이웨이 망, 거기다 대형 트레일러의 공헌은 결정적이다. 이들 운전자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돈도 잘 번다. 높다란 운전대에 홀로 앉아 그 거대한 차를 몰고 대륙횡단을 하는 모습은 아주 남성적이고 낭만적이다. 석양이 지는 언덕을 혼자 달리는 고독한 사나이다. 며칠 밤낮을 달려야 한다. 잠시 쉬어 가는 정거장엔 뚱보 아줌마가 반겨 맞는다. "하이, 마이 보이" 마치 제 아들처럼 어깨를 두드려주는 현대판 미국의 카우보이다. 이들은 고독과 싸워야 한다. 며칠 밤낮을 안전하게 달려야 한다. 체력도 좋아야하지만 인격적으로도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운전 경력도 베테랑이다. 입사 자격이 까다롭다. 수입도 좋아서 미국 사회에선 인기직의 하나이다. 세금도 많이 낸다.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자랑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연간 세금이 만불 이상이면 애국자로 존경받는다. 미국이 강국인 것은 국민들이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국으로 으시댈 수 있는 것도 미국은 고액 납세자가 많기 때문이다. 국민이 못 살아 세금을 낼 형편이 못되면 수억의 인구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히려 짐이다. 세금을 많이 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고로 고액 세부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경받는 애국자가 된다. 이게 미국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다.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난해 거액의 세금을 냈노라고 차 뒤에 쓰고 다니는 미국, 이해가 갑니까? 애국자요, 애국 차(車)다. -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어떤 모습의 애국자입니까? 꼭 세금이 아니더라도, 몸으로, 시간으로, 기도로, 어떻게 기여하고 있습니까? 대형트럭 운전사들은 밤낮으로 대륙을 운전하는 고된 노동자지만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데, 우리에겐 어떤 자부심이 있습니까?
처음 열두 사도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팔레스타인에 머물던 기독교를 사도 바울은 지중해 일대를 세 차례나 돌며 선교하여 세계의 기독교로 그 영역을 확대시켰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알렉산더나 시저, 그리고 나폴레옹과 히틀러 등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을 합친 것보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더 지대하다"며,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 곳이 어느 마을이나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곳은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들어오던 날, 로마의 하늘에는 복음의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토록 잔인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천년 왕국 로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계역사의 물줄기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기게 되었고, 지난 2천년간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에베소를 떠나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작별하면서, 그들에게 '양떼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당부하며, 그 동안 자신이 어떻게 이 교회를 섬겼는지 지난날 자기가 사역한 일들을 회상하며 고백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곳 에베소에서 3년 가량 머물며 사역을 하여, 이곳 에베소를 복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일대에까지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을 사도행전 19장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행19:26). 바울은 3년도 안되어 에베소뿐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에 복음의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자세로 일했기에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을까요? 19절 말씀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 목숨까지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 사역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모든 겸손'이라고 말한 '겸손'의 제사와, 다음은 '눈물'이라고 말한 '사랑'의 자세, 그리고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는 '인내'의 자세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이 사역의 자세를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겸손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모든 겸손과'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은 그의 모든 사역에서 언제나 겸손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이기에 그 사람이 이 복음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똑똑한 사람들을 보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도 별다른 열매가 없는 것은 겸손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은 겸손한 듯 한데,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쉽게 자기 자랑에 빠지거나, 교만한 태도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할 때 '논쟁에는 지고 전도에는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전도는 교리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설득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잘하여 상대방을 논리적으로는 꺾었는데, 그 사람을 기분 상하게 하여 복음에 대해 마음 문을 닫게 하면, 전도는 실패합니다. 대학생 선교회(CCC)에서는 '거지 전도단'을 만들어, 돈 한푼 주지 않고 전도단으로 파송하여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전도를 하게 하는데, 무엇을 도와주며 전도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겸손히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며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종의 자세로 일했기에 자기 생명조차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마칠 수 있다면 자기 생명까지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라고 묻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는 이유는 그의 지식이나, 두뇌, 미모, 재산, 지위 등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데,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자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겸손하지 못한 것은 종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 때문입니다. 종에게는 세 가지가 없는데, 하나는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다음, 종에게는 소유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의 소유로서, 주인이 맡기신 것을 관리할 뿐입니다. 또 종에게는 체면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주인이 야단치면 야단맞고 욕하면 욕먹을 뿐, 기분 나빠하거나, 불쾌해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봉사하다가 때로 시험받는 것은 이 종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나무꾼이 산에 가서 도끼로 나무를 잘랐습니다. 나무꾼이 집으로 돌아오자 도끼는 연장들이 많은 창고에 들어가서 자신이 그 큰 나무를 잘랐다고 큰 소리로 자랑했습니다. 나무꾼은 연장을 둔 창고 안이 시끌벅적 하자 창고에 가서 "왜 이렇게 소란이냐?"고 물어보니, 도끼 때문에 시끄러운 것을 알았습니다. 나무꾼은 시끄러운 도끼에게 "너를 날카롭게 만든 것도 나이고 너를 사용한 것도 나다. 너를 창고에 놓아두는 순간부터 너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쓰임 받기 위해선 불쑥불쑥 피어오르는 교만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릴 줄 알아야합니다. 어제 겸손했어도, 오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쉽게 교만해져서 높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지체부자유자들을 섬기러 갈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공원에서 지체부자유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계신 그 장소로 간다." 주님은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낮은 곳에 계십니다.
태생적으로 교만한 인간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요? "겸손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수도사에게 한 원로는 대답했습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간주하며, 다른 모든 사람 밑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스스로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로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항상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은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존재임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개선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둘째, 바울은 사랑으로 일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사랑을 '눈물'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저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눈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언제나 간절한 마음이 되어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그는 가벼운 농담이나, 마지못한 의무감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저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길 바라는 애타는 마음으로 간곡히 전했고, 때로 저들이 복음을 외면하거나 불순종하면,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눈물로 복음을 전하며 저들을 사랑했기에 바울이 이곳 에베소를 떠나게 되자, 사람들도 울면서 그를 전송합니다. 37절과 38절입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7-38). 사람의 감정은 상대적이라서, 저 사람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 나 또한 그를 위해 울 수 있고, 저쪽에서 나를 향하여 조롱과 비웃음을 보내면 나도 그를 향해 조소하게 되는데, 바울의 뜨거운 사랑이 저들의 마음도 뜨겁게 한 것입니다. 이 시대 무엇보다도 회복해야 할 영성은 눈물의 영성입니다. '천국은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칼 바르트는 '눈물은 웃음보다 천국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데일이라는 사람이 쓴 무디에 관한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지옥에 관해서 설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무디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옥에 관해서 설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왜냐하면 무디는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한번도 끝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디는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기만 하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져 죽음을 향해서 가야 하는 그 영혼들을 바라보았을 때, 무디는 더 이상 메시지를 계속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심정이었기에 에베소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할만큼 언제나 뜨거운 사랑을 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혹은 교회를 위해서나 믿지 않는 영혼을 위해 울어보았습니까?
윌리엄 부스는 그 시대의 영국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알고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웃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영국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눈을 열어 지옥을 볼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당장 그들을 붙들고 울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 영혼을 위한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인디언의 사도'인 존 엘리엇(1604-90)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인디언어로 성경을 완역한 최초의 인물인데, 그가 노후에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노쇠해서 기억력도 상실하고 판단력도 약해지고 건강도 잃고 가족도 잃고 듣는 힘도 보는 힘도 말하는 능력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에 사랑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랑만이 종말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셋째, 인내의 자세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에게 가장 큰 대적은 이방인들이 아닌,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2:14)라면서, 그들도 동족들로부터 고난받는 것을, 먼저 믿은 유대인 성도들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은 것을 본받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여 주의 일을 하려하면, 사단의 시험이 오는데, 대체로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훼방합니다. 가족이 핍박하거나, 같은 교인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방해하여 상처받고, 실망하여, 모처럼 봉사하고 섬기려던 일들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바울에게도, 가장 큰 시험이 되었던 사람들은 같은 동족이었습니다. 먼데 있는 사람 같으면 무시해버리거나 만나지 않으면 그뿐인데,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안 만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을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하여, 두 가지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는 '참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런 시험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주를 섬긴 것'입니다. 가까운 이들로부터 오는 시험은 참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서로 맞서 싸우면, 갈라서고 흩어지게 만들려는 마귀의 간계에 넘어갑니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으려고, 그 일을 포기하면, 그 일을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꾀에 넘어가게 됩니다. '아무개가 싫어서 이 교회를 떠나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마귀의 술책임을 알아야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개신교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은 중국역사상 외국인을 가장 적대시했던 시대에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입니다. 모리슨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 그는 그 기도대로 당시 가장 어려운 지역인 중국으로 가서 극심한 고통을 인내하며 선교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함께 일할 동역자를 구할 수 없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모리슨은 의사의 딸인 메리 모튼(Mary Morton)과 결혼했지만, 외국 여자가 광동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오랫동안 거주지를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남편과 너무 자주 떨어져 있어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결국 결혼한 지 6년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를 잃고, 두 자녀를 영국으로 보낸 그는 결국 혼자가 되어 복음증거에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 열매 없이 많은 세월을 고통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시간에 성경을 번역하는 귀중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1815년에 신약을, 중국에 온 지 17년만인 1824년에 구약까지 번역했습니다. 그는 25년 간 10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지만, 그가 고통 중에 번역한 중국어성경은 중국복음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칭기즈칸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몇 사람들을 '타르 탄'이라고 부르고, 그들에게 이런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① 당신들은 언제든 허락을 받지 않고 내 집에 들어올 수 있다. ② 당신들은 전쟁이 끝나면 노획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골라 가질 수 있다. ③ 당신들은 앞으로 세금이 면제된다. ④ 당신들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도 9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⑤ 당신들은 이 나라 안에서 가지고 싶은 땅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⑥ 당신들의 이런 권리는 앞으로 4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충성한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제가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연초에 제직수련회를 하는데, 당시 효성나일론에 평사원으로 다니던 집사님이 제게 "목사님, 교회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까? 제가 하나 해놓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교육관에 피아노가 없어 낡은 풍금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교회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으시면 교육관에 피아노 한 대 봉헌해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 집사님이 돈이 없어 카드로 전자오르간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제가 그 교회를 사임하고 나올 때,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직수련회를 하는데 목사님을 보니 왠지 피곤하고 지쳐 보여서, 목사님을 힘이 나게 해드리려고 교회에 무엇을 하나 해놓겠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지, 그가 효성 나일론에서 나와 안산에 섬유공장을 차렸는데,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인데도, 그 회사는 꾸준히 성장하여 염색공장까지 내고, 직원 50여 명 거느리는 알찬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보다도 교회에선 장로로 재정의 절반 가량을 담당하면서, 아프리카에 교회 일곱 개와 초등학교까지 세우고, 큰딸은 미국 뉴저지에 있는 수천 명 모이는 한인교회에서 오르간반주를 하고, 작은 딸은 골프장을 가진 가정에 시집가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고 있고, 그 공장은 대로변의 한 블록을 차지하는 금싸라기 땅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복된 바울이여!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우리와 똑같이 태양을 보며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잠과 음식과 의복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주님께 헌신하여 그토록 귀하게 헌신한 끝에 역사에 길이 남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히말라야 산자락 탕쿠타 지역에서 선교하던 한국인 부부 선교사가 추운 저녁 어느 날, 인근 마을의 네팔인 전도를 위해 나갔다가 몇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았다. 집에 피워놓은 난로가 넘어져서 불이 나 미처 피하지 못한 집에 있던 어린 두 자녀를 덮쳐버린 것이다. "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한다는 마음으로 행했던 선교역정이었다. 이들 부부는 며칠 간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다. 네팔 한인선교사회는 이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해 조기 귀국시키려던 어느 날, 선교사 부부가 한인 크리스천들 앞에 나타났다. "아직도 주님이 우리 자녀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다시 우리 아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하겠습니다. 차차 주님의 뜻을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남겠습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두 자녀를 묻던 날, 부부는 가슴속에 네팔인을 품었다. 바울이 토로했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는 고백을 했다. '사명'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단어는 히말라야에 묻힌 선교사 자녀들과 함께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꾼들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세상에서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이런 것들이 그리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 앞에 깨끗하게 헌신하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며,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하며 순종하고, 맡은 바에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행복과 보상이 있습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