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30 64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 1-6절)
2018년 9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중세 유럽에서 콜레라가 한참 유행할 때, 한 농부가 마차를 몰고 성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어느 부인이 마차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 부인은 농부에게 성까지 태워 줄 수 없냐고 부탁했습니다. 농부는 부인의 부탁에 승낙하여 함께 성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분위기가 좀 야릇하게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마차를 세울 때는 몰랐는데, 태우고 나서 부인을 보니 부인이 계속해서 소름끼치는 묘한 웃음을 자신에게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콜레라 여사입니다.”
“왜 제 마차에 타셨습니까?”
“저 성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러 가기 위해서 지요.”
“그렇다면 부인을 태워 줄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내리시오.”
“지금 날 태워 주지 않으면 당신부터 죽이겠소.”
“그러면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합시다. 내가 당신을 성까지 태워 줄 테니 다섯 명만 죽이시오.”
그래서 꼭 다섯 명만을 죽이기로 약속한 후 농부는 콜레라 부인을 태우고 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에 도착해보니 천 명도 넘는 시체들이 성 앞에 즐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화가 나서 “부인,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다섯 명만 죽이기로 했는데 이것이 웬 시체들이오?”
“나는 아직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들은 뭡니까?”
“저 사람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레 겁먹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염려는 치사율이 매우 높은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근심과 걱적은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근심이나 걱적이 무익한 줄 알면서도 스스로 이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내용을 조사해 보니, 그 걱정하고 있는 내용의 40%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걱정하고 있고, 나머지 30%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걱정하고 있으며, 그리고 12%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그 일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불확실한 일을 걱정하고 있고, 걱정하고 있는 일 전체 가운데서 8%만이 어쩔 수 없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그 8%의 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걱정한들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걱정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을 스스로 사서 걱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닥친 이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의 문제는 마음과 정신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근심과 걱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사실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현실이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어떤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못하는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에 관여하셔서 복되게 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사람은 실패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문제도 지혜가 부족하여 실패하시거나 잘 몰라서 일을 그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 속에는, 하나님과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그 결과에 있어서 선이며, 모든 것이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사정을 모르고, 그 결과를 모르기에 “일이 잘못되었다”고 걱정하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정을 그 깊은 내용과 결과까지 다 아시고 선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와 섭리를 믿는 사람은 오늘의 실패와, 오늘의 고난, 오늘의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두려움 없이 평안하며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믿는 것입니다. ‘다스리심’을 믿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 말씀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믿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인생에 발생되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우연이지만, 신자에게는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입니다. 그리고 인도하심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은 너무 힘들어서 하실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셔서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의 인생이 잘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넘치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찌질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판단과 관점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주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라는 시에서 ‘언제나 주님을 믿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또 저 자신을 진실로 알지도 못하고,
제가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해서
제가 실재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사실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러한 갈망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갈망을 저버리는 일은 그 무엇도
제가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끄실 것임을 저는 압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대해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비록 길을 잃은 듯이 보이고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하더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계실 터이므로,
그리고 주님은 제가 온갖 위험을 홀로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안해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래가 암담합니다. 좌절하고 낙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걱정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패배라 아니라, ‘내 아버지 집에 가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저주나 패배가 아니라, 아버지 집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서도 흔들리 않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장 23절 말씀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떠나서'란 말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아날뤼에인인데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가 천막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변에 가서 캠프 생활을 하다가 끝나면 천막을 척 걷어서 둘러메고 차에 실은 다음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캠프 생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이요, 떠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닻을 감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배가 정박할 때에는 닻을 내립니다. 닻을 내리고 기다리다가 떠날 때가되면 닻을 끌어올립니다. 이 닻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그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일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닻을 감아 올리면 이제는 출발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이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들어갑니다. 또 오랫동안 이 세상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 닻을 걷어 버리고,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고 약속이 있는 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떠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빨리 떠나 오래 기다리고 바라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견고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내일에 대한 소망이 확실할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하지 않게 되고, 지금의 현실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지금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영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야 진정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영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오늘을 오늘 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원속에 사는 사람이라야 현재적 염려와 근심을 상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현재도 없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귀한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 소망을 품고 우리는 이 땅을 승리하며 보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비결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저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내일이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실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요한복음 13:1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즉 이해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먼저 요구합니다. 그 이해에 의존하여 사랑하려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다가도 상대방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낙심하고 좌절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그런 유의 사랑이 아닙니다.
13장 1절에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시리라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이들은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습니다. '네가 우편에 앉을 것이냐, 내가 좌편에 앉을 것이냐?' 치열한 명예 다툼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이런 인간들을 제자라고……' 우리 같았으면 이렇게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os, I.)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부터 먼저 씻기셨다고 전합니다. 차례차례 열두 제자의 발을 모두 씻기십니다. 왜 씻기시는지도 모르는 이 답답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절)." 요즈음 우리의 사랑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무 얄팍합니다. 당장에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안달이 나 있어요. 툭하면 기자회견부터 먼저 하려고 드는 세태입니다. 소문부터, 말부터 요란해야 성에 찹니다. 좀 은근한 구석이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문득 '아, 내가 그때 그런 사랑을 받았던가? 그분이 나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던가?'하고 절감하게 되는 멋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모르는 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또 주님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원수 사랑이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에게 행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같이 받고 있는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원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0절에서 이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내가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이미 내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존경을 받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을 받고 사랑하셨습니다. 원수 사랑, 바로 그 사랑을 우리가 먼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분의 사랑 앞에 내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심과 복됨으로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무엇이 우리로 낙심케 하고, 무엇이 내 마음을 근심케 합니까?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선하신 섭리와 능력을 믿는다면, 마음의 근심을 깨끗이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오늘의 현실의 근심과 걱정이나 불안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당신의 생명까지 주시며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염려와 걱정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