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 63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2019년 1월 20일 주일예배
에베소서 2 : 1 - 10 ; 시편 31 : 19
딸이 엄마의 휴대폰을 보니, 통화목록에 'ㅅㅂㄴ'이 뜨기에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여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ㅅㅂㄴ이 누구야?" 엄마가 "응, 네 아빠지 누구니?"라고 하자, "엄마! 도대체 어떻게 아빠를 시발놈이라고 할 수 있어?"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하는 말 "뭐? 시발놈이 뭐야? 서방님이야, 서방님!" 같은 글자인데, 사랑과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서방님'도 되고, '시발놈'도 됩니다.
이 시대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복음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둘 다 세계적인 명문대학 옥스퍼드를 졸업한 천재들입니다. 그런데 도킨스는 무신론자로서 큰 명성을 얻은 사람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써서 유명해졌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는 [도킨스의 망상](The Dawkins Delusion?)을 써서 무신론의 허위를 드러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맥그래스도 젊었을 땐 한 때 무신론에 빠졌고, 도킨스와 같이 옥스퍼드대학의 자연과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분자생물학을 전공해서 22세에 학위를 취득하고, 얼마 후에는 동대학과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대학을 나오고 함께 무신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천재적인 사람들이지만,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무신론의 거두로, 또 한 사람은 복음주의 신학자의 대표로 인생의 행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맥그래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킨스와 나는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토록 오래 연구하고, 생각하고, 추론하고, 분석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반대의 결론이 나올까? 가능한 한가지 이유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이라는 엄청나게 전염성이 강하고 강력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 결과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었지만, 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통치한다는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불신앙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인생행로를 갈라놓았을까요? 맥그래스에게는 도킨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력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십자가를 통해 그의 심장으로 흘렀던 은혜가 그의 세상관, 역사관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답답하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젊은 연예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안 할 것 같은데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목사님이 칭찬했더니, 유명 그룹 멤버 중 하나가 "목사님, 요즘 연예계 생활하려면, 마약을 하든지, 예수를 잘 믿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립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화 같은 구출사건이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서 있었습니다. 1976년 6월 27일 아테네공항을 출발한 에어프랑스(Air France) 여객기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게 공중 납치되어 102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비행기는 당시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이 통치하던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자, 당시 라빈 수상이 이끌던 이스라엘에서는 긴급 각료회의가 열려 비밀히 중대결정을 내렸습니다. 며칠 후 당시 30세의 벤야민 네탄야후 대령이 이끄는 특별작전요원들이 4대의 카고 비행기와 2대의 707보잉제트기 가운데, 한 대에만 전투요원들이 탔고, 나머지는 부상자들의 치료 및 후송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저공비행으로 레이더망을 피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한 다음, 불과 15-20분 만에 작전을 성공시켜 인질을 구출하고 유유히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엔테베 작전'입니다. 세 명이 인질과, 작전요원 한 명이 희생되긴 했지만, 이 작전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구출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 후 네탄야후 대령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마음속에 두려움을 없었습니까?" 이때 네탄야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동족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과, 그들을 구원해야한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작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내가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 말씀은 은혜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던 때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비극적인 처지를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 영적으로 죽은 상태, 둘째, 원수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 셋째,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진노의 자식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분리'를 뜻합니다. 육체적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저들은 하나님을 피하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 죽음의 상태가 되었고, 끝내 육체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꺾여지면, 잠시 동안은 푸른빛이 그대로 있어 살아있는 듯 해도, 이내 시들고 말 듯이,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그 순간 영적으로 죽게되고, 육체는 잠시 살다가, 곧 시들어 죽고 맙니다.
사람들은 문화인과 미개인, 지성인과 야만인, 그리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인간 등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지만, 성경은 인간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지금 예수 믿는 우리도 이전에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여기 '다른 이들과 같이'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인간은 모두 '본질상', 즉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다고 했는데, '허물'이란 '밟지 말아야할 땅에 들어간 것'을 뜻하는 말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란, 화살이 명중시켜야 할 과녁에서 빗나간 것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즉 하나님의 법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란,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라(do)'와 '하지 말라(do not)'는 두 가지인데, 인간은 하라고 하신 것은 하지 못했고, 도리어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행하여 하나님의 법을 깨뜨려,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누구나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악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은혜가 시작됩니다. 그런고로 나의 나 됨은 오직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될 때만 은혜가 은혜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은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 속에 살고 은혜 속에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라야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게 되고 깨닫습니다. 믿음으로만 겸손케 되고, 자기 됨을 알고, 은혜를 받아들이고, 은혜의 그 깊고 넓은 뜻을 알게 됩니다.
미국 달라스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장소엔 X 표시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한다고 합니다. 케네디가 죽은 뒤 어느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렇게 젊고, 그렇게도 멋있고, 그렇게도 용기 있는 뉴프런티어의 기수가 그렇게 갑자기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그리고 그 잡지는 "당신이 그 다음이 될지 모른다"(You may be the next)고 경고했습니다. 히틀러도 오나시스도, 마릴린 먼로도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의 딸이 미국에 망명하여 스탈린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무엇을 본 것처럼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뭔가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런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며, 두려운 표정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 죽어갔다." 우리도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을 생각하며 영혼의 구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단계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말씀처럼, 죽음과 사단의 지배와 하늘의 진노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된 것입니다.
본문에 이 은총에 이르게 한 네 가지가 나옵니다. 곧 '긍휼'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입니다. '긍휼'이란 '어떤 사람을 마땅히 저주해야 하는데, 저주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이 허물과 죄로 인해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저주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 긍휼입니다. '사랑'이란 '아가페'로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가 저주받을 죄인임에도 우리의 유익을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데도 저주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다음 '자비'란 '가장 소중한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구체적인 행동(action)'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유일하게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것으로 그 이야기를 끝내시면서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하고 물으시자, 듣고 있던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처럼, 성경에서 자비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위대한 목회자 헨리 무어하우스가 어려운 일에 닥쳐서 낙망했을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들어오는 그를 응접실에서 놀고 있던 딸아이가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딸아이는 아빠가 들고 오는 꾸러미를 보자 휠체어에서 일어나며 "아빠 그게 뭐예요?"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줄 거란다. 엄마 어디 계시니?" "2층에 계셔요. 아빠 이리 주세요. 내가 들고 갈게요." 이 말에 헨리는 "아니, 너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 꾸러미를 2층에 있는 엄마한테 가지고 간다는 거니?"하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사실 그의 딸은 소아마비를 심히 앓고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 꾸러미를 제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으면 되잖아요?"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하나님이 나를 이와 같이 안고 계시는데, 왜 내가 그토록 좌절하고 고민하고 근심했던고?'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 후로 어떤 일에도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고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우리는 이제 내 의지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자격 없는 죄인임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납하심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긍정하신 그 긍정 안에서 내 존재를 긍정하고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를 위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내 의지나, 공로나, 율법의 준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자격을 갖추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보니까, 우리는 때로 아직도 온전치 못한 자신을 보면서 이 은혜에 대해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나처럼 부족한 자가 과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며, 아직도 온전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할 때에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때로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나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신앙생활에서 회의와 낙심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그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미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된 것이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 은혜를 깨달으면, 원망도 불평도 없는 기쁨의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지식, 건강, 가정, 직장, 그 무엇도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은혜 안에 내 존재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리오의 시장에서 코파카바나의 한 성직자가 슈퍼에서 고기를 구입하려고 줄을 섰는데, 갑자기 새치기를 하는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그녀를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맞서 같이 욕을 해댔습니다. 상황이 점점 험악해질 때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습니다. "마담,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분노로 격할 때 갑자기 사랑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고, 순식간에 소란은 잠잠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여자는 줄 뒤로 물러났고, 사람들은 자신이 그녀에게 뱉은 심한 말을 사과했습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9). 어느 것도 내가 이룬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이 겸손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선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름대로 어떤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욱 겸손한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교회에서 회의를 주재하는데 한 젊은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이때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젊은이에게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하나님이 그대를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쯤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걸세." 우리는 너무 원리 원칙만 따지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칙대로만 다루신다면 그 하나님의 원칙 앞에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은혜 받은 자기 본분을 알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자'라는 자기 정체를 알고, 이 선한 일을 위해 힘써야합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로서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이에 감사하여, 이 은혜에 보답하려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은혜를 갚아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기 본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고 권고했습니다. 이 '헛되다'는 말 '에이스케논'은 '빈', '공허한'의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는데,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전 미래산업 회장이었던 정문술 집사님이 여러 해 전에 300억 원을 카이스트에 연구비로 기증하여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회사가 연구발전이 안되어 사업이 부진하고 어렵던 때, 카이스트 이광형 교수가 찾아와 첨단기술을 전수해주어 회사가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광형 교수에게 "어째서 그 훌륭한 기술을 아무 대가없이 전수해 주었느냐?"고 묻자, 그분이 대답합니다. "국가가 나를 선진국에 유학까지 시켜서, 나로 하여금 과학 기술인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봉사하고 보답하고 싶었다." 은혜를 보답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남편을 잃고, 친정도 시댁도 없이 말기암에 걸린 여인에게 7살 된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위안 받아보려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겨질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데, 교회 집사님과 딸을 입양시설에 보내는 문제를 의논하자, 집사님이 사모님께 말하여, 혹시 교회에 입양할 사람이 없을까 예배시간에 광고했습니다. "우리 중에 어린 딸을 두고 떠나야할 자매가 있는데, 혹시 입양을 원하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그 날 세 딸을 둔 부목사 사모가 자신의 딸이 그 아이와 유치원 친구라 입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호스피스로 자리를 옮기고 삶과 죽음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천국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긴 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뒀습니다. 여인은 숨지기 얼마 전에 집사님께 고백했습니다. "내가 혹시 건강이 회복해서 낫는다 해도, 내 딸은 목사님 댁에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너무 행복해요. 천국에서 만나요."
작자 미상의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말할 때]라는 글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많지만 잃었던 나를 찾고 용서받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말할 때 나는 자랑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늘 휘청거리기에 목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강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약하나 강력한 힘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성공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도 많지만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도록 예수님이 용기를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점이 너무 많은데도 주님은 나를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아직도 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의 이 아픔을 예수님과 나누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보다 선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단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말년에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으로 만도 시간이 없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믿음이란 울음으로 시작된 인생이 기쁨으로 끝나게 하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사랑을 믿고, 그 은혜를 기뻐하고 보답하며 살아갑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