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9 203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2020년 3월 29일 주일예배
고린도전서 1 : 18 - 24 ; 민수기 21 : 8 - 9
십자가를 목에 달고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자매를 보고 한 형제가 "자매님, 십자가는 그렇게 목에만 걸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충고하자, 그 자매가 말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하며 목을 휙 돌려 십자가목걸이를 등뒤로 돌리더랍니다. 제가 처음 태국에 갔을 때, 거리에서 십자가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고 무척 반가워 가이드에게 "태국에도 제법 크리스천이 있군요"하고 말했더니, 가이드가 "아닙니다.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지,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라는 말에 아연실색하였습니다.
옛날 중국 초나라에 변화(卞和)라는 현자가 초산에서 묘한 구슬을 하나 발견하여 초나라 여왕에게 바치자 여왕은 그것을 감정하니 감정사는 그것을 돌이라고 하자, 여왕은 왕을 속였다고 변화의 왼발을 잘랐습니다. 후에 무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왕에게 바치니, 무왕도 그것이 역시 돌이라는 말에 격노하여 변화의 오른 발도 잘랐습니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초산에 나아가 사흘밤낮을 통곡하자 사람들이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두발을 잃은 것이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운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왕은 그 구슬을 잘 다듬으니, 중국 역사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천하제일의 구슬로 '화씨벽(和氏璧)'이 되었고, '완벽(完璧)하다'는 말도 여기서 생겼습니다. 훗날 이 구슬이 조나라 왕에게 들어가자 진나라 왕은 성 15개와 바꾸려했으나 거절당했는데, 참된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에 변화는 통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데, 사람들이 이를 모르자 울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3:18)며 탄식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십자가 발 밑에 돋아있는 사소한 미덕들을 우리는 매우 소중히 여겨야한다"고 하자, 한 제자가 묻습니다. "스승이 말하는 사소한 미덕이란 무엇입니까?" 프란시스코가 대답합니다. "겸손, 온유, 인내, 인자, 정중함, 명랑함, 친절, 동정, 소박, 성실, 무례를 용서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마음 같은 사소한 미덕들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피는 제비꽃처럼 피어있다. 그런 미덕들은 그늘진 곳을 좋아하고 이슬을 먹고살며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 달콤한 향기는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런 '겸손, 온유, 인내, 친절, 성실' 같은 덕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소중한 미덕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것을 '사소한 미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소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도'란 헬라어 '로고스'는 '말씀'을 뜻합니다(요1:1). 그러니까 이 말은 '십자가의 말씀', 또는 '십자가의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희랍인들은 지혜를 숭상했고, 공자 선생님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夕死可矣)고 말했는데, 여기 '십자가의 도'란 일반적인 지식이나 논리가 아닌, 절대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십자가'와 결부시키고서, 거기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또 본문 바로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이에 대한 믿음을 증거합니다.
존 스토트는 말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우리가 죽어야할 죽음을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의 가족으로 입양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벌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서든지 종족이나 언어나 종교가 다르더라도 십자가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심지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십자가 깃발이 있는 곳이면 서로가 생명을 아끼며 돌봐주는 인류애가 꽃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거하는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십자가는 형벌과 고통의 상징입니다. 성경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을 가장 치욕스런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본래의 십자가는 흉악한 범죄자를 처형할 때 쓰는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살인자와 같은 흉악범과 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자를 십자가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지역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수직으로 된 말뚝 위에 가로로 횡대를 만들고 그 위에 죄수를 매달고 손과 발에 못 박았습니다. 사형수는 형장에까지 십자가를 메고 가서 그 위에 산채로 매달리면 피와 기름이 다 빠지고 지쳐서 죽게되는 가장 잔인한 사형이었습니다. 유대역사가 조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십자가 처형이 자주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몸서리치는 증오하는 대상이었기에, 시세로(Cicero)는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캔자스 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Howard Matzke) 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리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 장에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중단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십자가는 가장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우리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4-36)라고 기도하신 것을 보면, 이 십자가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아셨습니다. [가이드포스트] 2010년 8월호에 실린 키이스 밀러(Keith Miller)의 [나는 용감해]라는 글입니다. - 대공항 시기에 오클라호마 주 전역에 예방 접종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속한 1학년 학급이 첫 접종대상이었다. 그 날 엄마가 학교에 오셔서 선생님과 간호사를 도와 우리를 달래주었다. 맨 처음 주사를 맞은 여자아이가 비명을 지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른 모든 아이들도 덩달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주사약이 다 떨어지길 바라며 교실 뒤쪽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엄마가 선생님과 간호사에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키이스, 모두들 겁을 먹었구나. 네가 앞으로 나가서 지금 주사를 맞겠다고 말하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조금 따끔할 뿐이란다. 넌 할 수 있어." 그것만큼은 정말 하기 싫었다. 다른 아이들 기분이 어떻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도 무서웠단 말이다. 그래도 하라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가만히 다가가, 그 분의 눈을 바라보며 팔을 걷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다음에 맞을게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용케 울음을 터뜨리지도, 고함을 내 지르지도 않았다. 그런 뒤 소매를 내리고는 차분하게 내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 날 내가 배운 것이 있었다. 엄마가 내게 읽어주던 이야기 속의 영웅들도 때로는 두려웠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용감한 사람들도 두렵긴 마찬가지이겠구나.'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셨음에도 그 길을 가셨음에 감사 드린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본문 18절과 19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1:18-19)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 세계는 그리스 문명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로마 문명'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로 통했고, 고린도는 무역의 중심 항구로 세상의 모든 지혜가 이 항구를 통해 수입되고 있었습니다. 헬라인의 최고 선, 최고 가치는 지혜로서 모든 부모들은 '지혜의 사람이 되라!'고 그들은 자녀를 교육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들이 추구하는 지혜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사실 그들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는 이런 인간 지혜의 한계를 간파하고 '네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요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톰도 "오늘의 지혜자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다는 면에서 정말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정보화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도 사람들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축적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데는 점점 더 무지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로는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다음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수용하고 주님께 나오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알려주지 못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얻게 합니다. 세상은 이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십자가야말로 참된 하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얻어야할 가장 중요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진리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가지 속성은 '의로움'과 '사랑'인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범죄한 인간에게 심판을 내려야 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훼손됩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면 하나님의 의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사랑이 무너지고, 사랑을 나타내면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충족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고대 그리스의 힐루카 왕 당시에 미성년자들의 음행이 성행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사회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그들을 엄벌에 처하기로 하고, 음행을 하다가 잡힌 미성년자들의 두 눈을 빼 버린다고 전국에 공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일 먼저 힐루카 왕의 젊은 왕자가 음행을 하다가 적발되었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아 버리기도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왕자에게만 예외를 베풀면 법의 공정성이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대신들에게 법대로 집행할 것을 명령했고, 왕자의 오른 쪽 눈이 뽑히는 것을 본 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왼쪽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처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아울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충족된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그리스인들이 1세기에 헬라문명을 다음 세대로 전수하고 있을 때, 인류 문명의 또 하나의 축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은 없었으나,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1세기 세계 모든 중요 도시에서 막강한 자본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 가치는 능력으로, 그들은 자손들에게 '능력의 사람이 되라'고, 돈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되라고, 돈만이 그들을 지킬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늘의 표적을 구했었다면, 1세기 유대인들은 땅의 안전을 지키는 돈의 표적에 몰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2절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와 연약함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23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능력의 상징인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는 역설적인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았던 유대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기적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영적 군대를 데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무력한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살리려했던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6)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를 쓴 일본의 크리스천작가 엔도 슈샤꾸는 '개처럼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런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우리 구원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고 말합니다.
옛날 핀란드의 한 어진 왕에게는 공주만 하나 있을 뿐 자기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기에, 왕의 대를 이을 사윗감을 구한다고 전국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건장하고 똑똑한 청년들이 몰려와 무예를 통해 20명이 합격하였습니다. 다음은 지혜의 시험으로,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무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그 나무는 얼마나 길어야 할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려면 나무가 또한 얼마나 길어야 할까?'생각하며 크고 좋은 나무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은 '하나님,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일어서는데 성전에 걸린 십자가가 번쩍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다. 십자가다!' 그는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왕 앞에 갔습니다. 다른 청년들도 각기 나무들을 가져오자, 왕은 하나씩 물었습니다. 마침내 이 페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져왔느냐?" 그러자 그는 나무 십자가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무입니다. 세로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가로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합니다." 왕은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자네야말로 내 사윗감이네. 왕이 될 자격이 있네." 그래서 그 청년을 공주와 결혼시켜 사위를 삼고 왕의 자리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말했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를 이기는 힘이 있고, 하늘의 행복이 있고, 영혼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영혼의 즐거움이 있고, 덕의 극치가 있고, 영원한 완성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어떤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유할 수 없고, 생명도 희망도 십자가를 떠나서는 없습니다. 그대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도리를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책임이란 말을 빼버리면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는데, 인생을 살아가려면 많은 책임이 수반됩니다.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처럼, 합당한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쓰레기 같은 것밖에 없습니다. 헨리 블랙카비는 말합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류 웰리스의 유명한 작품 [벤허]에서 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유다 벤허가 자기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로마의 장군 멜살라에 의해 잡혀서 노예의 몸으로 팔려갔다가 로마의 한 호민관을 살려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양아들이 되어 멜살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팔레스틴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문둥병자가 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전차경기에서 멜살라에게 복수를 하지만, 자기 가정에게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절망과 로마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고 있을 때, 마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무섭게 내리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피가 흘러 대지를 적십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가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유다 벤허는 그만 압도됩니다. 그토록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로마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순간 눈 녹듯 사그라지며,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비에 씻겨 흘러내린 그리스도의 흘린 피에 젖어 그의 어머니와 누이의 문둥병이 깨끗이 낫게 되는 장면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한 작품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질병과 고통을 대속하신 구원의 십자가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말합니다. "대신한다는 것은 죄와 구원의 핵심에 모두 존재한다. 왜냐하면 죄란 본래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를 스스로 대신하신 것이다."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에서 학생들이 두 교수를 반대하여 강당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던 때, 니이지마 조(新鳥 襄) 총장이 단에 올라가 대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쳤습니다. 놀란 학생들이 달려와 회초리를 빼앗았을 때는 이미 살이 찢어져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이때 니이지마 총장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잘못이 있는 교수 대신 내가 맞았고, 학교를 소란하게 한 학생들 대신 내가 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교수들도, 학생들도 받아야 할 벌을 치렀으니 모두 용서가 되었습니다." 전에 중앙일보 기자가 방지일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죄 사함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죄가 없다. 그래서 죄를 안고선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 죄로 얼룩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썬다 씽도 말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는 이들을 책임진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8-9). 이스라엘 백성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고 살 수 있었듯,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